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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사채와의 전쟁, 피해 규모도 모르는 정부[기자의 눈/정순구]

입력 | 2024-02-22 03:00:00

정순구·경제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선 적의 규모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죠. 지금 정부가 불법 사금융 피해 규모를 추상적으로라도 알고 있나요?”

불법 사금융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금융업계 전문가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불법 사금융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관련 범죄 척결에 나섰지만 그 무엇보다 먼저 진행했어야 하는 과제가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 불법 사금융의 피해 규모는 그 어떤 곳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민간 기관인 한국대부금융협회가 접수 민원을 취합해 평균 대출 금액과 금리 등을 알리는 게 전부다. 공무원들 중에는 불법 사금융 피해자와 피해 액수가 연간 얼마쯤 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20일 본보의 기획 기사가 나간 직후 “이 통계는 처음 보는데 어떤 부처에서 취재했는가”라며 묻는 부처 관계자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금융당국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피해 규모를 추산하고 있지만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외부에 공표도 못 하고 있다.

정부가 피해자들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이들이 얼마나 피해에서 회복됐는지 점검하려는 노력조차 없다. 정부는 불법 사금융 피해자를 위해 대부업자의 추심 행위에 대응하고 피해액 반환 청구, 손해배상 등 법적 절차도 대신 해주는 채무자 대리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단순히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지원했다’는 식의 홍보성 통계만 발표할 뿐 해당 제도의 지원을 받은 피해자들이 나중에 실제 소송에서 이겼는지, 피해액은 얼마나 돌려받았는지와 같은 사실관계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를 당국에 물어보니 “일일이 피해자의 상황을 체크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지금도 불법 사금융 피해자들은 지인과 가족을 볼모로 한 악질 협박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졸이고 있다. 관련 범죄를 척결하겠다는 정부 의지는 환영할 일이지만, 대통령의 지시에 앞뒤 가리지 않고 규모도 알 수 없는 적을 향해 무작정 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더 늦기 전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을 되새겨 보길 바란다.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