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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원전 5년에… 원전中企, 아직도 ‘일감 보릿고개’

입력 | 2024-02-22 03:00:00

“원전 재개돼도 1년뒤에야 일감”



14일 오후 4시경 경남 창원 원전 부품 기업 영진테크윈 공장의 금속 가공 기계가 멈춰 서 있다. 기계 왼쪽에 당일 작업 내역을 적어두는 화이트보드 역시 텅 비어 있다. 공장 가동률은 30∼40% 수준이라 12명의 직원 중 절반가량만 일을 하고 있었다. 창원=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


14일 경남 창원의 원자력발전소 부품 제작 기업 영진테크윈 공장. 한울 원전에 들어갈 교체용 부품 가공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기계설비 12개 중 9개는 멈춰 있었다. 원전 신규 건설이 쏟아지던 2010년대에는 기계 20여 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전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5년 동안 ‘개점휴업’ 상태였던 때보다는 사정이 다소 나아졌지만, 아직 공장 가동률은 30∼40% 수준이다. 현재 진행 중인 한빛, 한울 원전 부품 제작은 이르면 한 달 뒤면 끝난다. 강성현 영진테크윈 대표는 “신한울 3호기 관련 발주가 예정돼 있지만 올해 말에서 내년 초에나 들어올 것으로 예상돼 길게는 1년 정도 원전 일감이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탈원전 정책 폐기에도 원전 관련 중소기업 중에선 여전히 일감 부족에 시달리는 곳이 많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지난달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 원자력 산업 매출액은 탈원전 추진 이전인 2016년의 93% 수준까지 회복됐음에도, 그 온기가 원전 생태계 전반에 퍼지지 않아 ‘일감 보릿고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조만간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지만 후반부 공정을 담당하는 중소·중견 기업들은 건설이 시작되더라도 곧바로 일감을 받진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계 12개중 9개 놀려… 원전정책 또 바뀔까 투자-채용 못해”

원전 中企 ‘일감 보릿고개’
발전기-자동차 부품 납품하며 버텨
업체 57% “정책 일관성이 최대변수”
민간주도 SMR 등 산업 재편 필요
이날 영진테크윈 공장 한쪽에는 비상용 휘발유 발전기에 들어가는 로터(회전체) 50여 개가 쌓여 있었다. 원자력발전소 관련 일감이 끊길 때를 대비해 발주를 받아둔 제품이다. 강 대표는 “탈원전 시기엔 항공기나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며 버티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원전 부품업체 중에는 영진테크윈처럼 원전 관련 발주가 줄어들 때를 대비해 다른 일감을 찾는 곳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날 방문한 창원 소재 금속 도색·도장업체인 ‘코텍’은 최근 수년간 원전 사업 비중을 줄이고 장갑차 등 방산 분야 납품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탈원전 이전까지 연간 15억 원 수준이던 원전 부품 매출은 현재 5억∼10억 원 수준으로 줄었다. 박대근 코텍 대표는 “아직 원전 관련 부품 수주가 적고 사업도 한정돼 있어 원전 사업만으론 기업을 운영하기 곤란하다”고 했다.

● “원전 정책 뒤바뀔지 몰라 신규 투자 못해”

정부는 ‘원자력산업 생태계 회복’을 주요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관련 정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상당수 중견·중소기업의 매출은 회복세가 더디다. 발전소 건설에만 10여 년이 걸리는 원전 산업의 구조 때문이다. 원전 건설은 설계부터 원자로 설치 및 기능 시험까지 여러 공정으로 진행되는데, 후기 공정을 맡은 기업들은 신규 원전 건설이 시작되더라도 5∼8년을 기다려야 일감이 생긴다.

이에 따라 정부가 상반기(1∼6월) 중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실제 건설이 시작되더라도 그 효과를 많은 기업들이 체감하는 데까지는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관측된다. 발전소 내 계측설비를 제작하는 중견기업 우진은 “발전소 내 전류, 전압 등을 측정하는 계측설비는 원전이 80% 이상 완공된 뒤 설치를 시작하기 때문에 매출이 발생하려면 최소 7, 8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탈원전’을 경험한 원전업계에선 신규 원전 건설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달 말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발표한 ‘2022 원자력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원자력산업의 경쟁력 확보 제약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514개 기업 중 293곳(57.0%)이 “정부 정책의 일관성”이라고 답변했다. 언제든 다시 원전산업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뀔 수 있어 산업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한 원전 부품 기업 대표는 “원전산업은 정책 일관성을 보장할 수 없어 선뜻 인력을 늘리거나 설비 투자를 확대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며 “앞으로도 한동안 추가 설비에 투자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 “민간 주도로 산업 재편해야”

원전업계에 안정적으로 일감을 공급하기 위해선 해외 원전 수출을 확대하고, 정부 주도 대형 원전 건설 중심에서 민간 주도 형태로 산업을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원전 수출은 장기적으로 업계 전체에 대규모 일감을 공급할 수 있다. 2009년 수출이 성사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사업은 건설 계약만 20조 원에 향후 운영 및 부품 수출까지 더하면 총 90조 원에 달하는 경제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한국은 한국수력원자력 주도로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전에 나서고 있다. 최근 미국 원전 업체 웨스팅하우스가 자격 미달로 탈락하며 한국과 프랑스전력청(EDF)의 ‘2파전’이 벌어지고 있다. 체코 정부는 6월 중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정부 주도 원전산업의 불확실성이 큰 만큼 민간 원전산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전 세계 70여 개 기업에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소형모듈원전(SMR)은 원전산업을 민간 주도로 전환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로 여겨진다. SMR은 원전 1기당 건설 단가가 기존 원전에 비해 20분의 1 수준으로 적고 건설 기간도 짧아 개별 민간 사업자가 건설에 뛰어들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는 두산에너빌리티 등 기업과 손잡고 SMR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사업 계획을 준비 중이다.




창원=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