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많은 사람이 ‘문구’를 필요할 때만 즉시 구매해서 사용하는 소비재로 여긴다. 하지만 문구 덕후들에게는 관상용 작품이 되기도 한다.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감을 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연필깎이도 그중 하나다. 필자는 최근 비싼 연필깎이들을 수집 중이다. 손가락 두마디 정도 길이에 디자인도 심플한데 가격이 무려 3만 원에 달한다. ‘무슨 연필깎이를 저 돈 주고 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요리조리 살펴보면 비쌀만 하다. 통통 튀는 아이디어로 저마다의 강점을 갖춘 제품들이다. 강철로 만든 칼날, 연필을 작품으로 승화시켜주는 기능, 3040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이미지까지! 값어치가 충분한 프리미엄 연필깎이들을 소개한다.
소소한 지식: 연필깎이의 탄생 배경은?
: 고급 식칼에 맞서는 연필깎이?
‘KUM(쿰)’은 1919년부터 연필깎이를 제조해 온 독일의 문구 브랜드다. 판매하는 연필깎이 종류만 무려 42가지. 그 중 마스터피스는 최고 프리미엄 라인에 속한다. 롱포인트 연필깎이인데 잠시 롱포인트와 숏포인트의 차이부터 알아보자.
롱포인트는 연필심을 길고 날카롭게 깎을 수 있는 제품이다. 단, 연필심이 길면 쉽게 부러질 수 있어서 힘을 빼고 사용해야 한다. 필기용보단 힘을 뺀 채로 잡는 소묘(그림)용 연필을 깎을 때 사용하기 적합하다.
숏포인트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일반적인 길이로 연필심을 깎아준다. 힘을 줘서 사용해도 무방한 필기용 연필을 다듬을 때 추천한다. (쿰의 숏포인트 연필깎이는 더 짧고 뾰족하게 깎이는 편이다.)
롱포인트로 깎은 연필(좌), 숏포인트로 깎은 연필(우)_출처 : 문구소녀
마스터피스에는 2개 홀이 있다. 1번 홀로 연필의 나무 부분을 깎은 후, 2번 홀에서 연필심의 뾰족함을 다듬는 방식이다. 감탄스러울 정도의 부드러운 사용감이 특징이다. 연필깎이를 쓰다보면 매끄럽게 사각사각 깎이기보다는 서걱서걱 불안정하게 깎일 때가 많다. 마스터피스를 사용할 땐 매끄러운 소리만 들릴 뿐이다.
2개 홀로 구성된 KUM 마스터피스_출처 : 문구소녀
부드러운 사용감의 비결은 ‘칼날’에 있다. 쿰은 모든 연필깎이에 철 중에서 가장 강도가 높은 고탄소강 스틸 카본 칼날을 탑재한다. 고급 식칼보다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는 소재다. 여기에 광택, 초음파 세척, 오일 코팅 등의 후처리 과정을 더해 칼날의 내구성을 높인다. 연필 브랜드로 유명한 ‘블랙윙’은 자사 연필깎이에 쿰의 칼날을 활용하고 있다. 연필 브랜드도 인정한 연필깎이계의 명품 칼날인 셈이다.
프리미엄 라인답게 마스터피스는 본체 또한 남다르다. 여느 연필깎이처럼 플라스틱 소재가 아닌 마그네슘으로 만들어 튼튼하면서도 가볍다. 또한 칼날을 유격없이 잡아줘서 안정감있게 연필을 깎도록 돕는다. 칼날부터 본체까지 연필깎이계의 마스터피스라고 불릴 만하다.
나카지마 주큐도 '츠나고'(3만 원대)
: 컬래버레이션 연필을 뚝딱!
쿰이 단단한 칼날과 정교한 사용감을 뽐낸다면, 일본의 나카지마 주큐도는 귀여운 디자인과 이색적인 기능을 강조한다. 필자가 구매한 ‘츠나고(Tsunago)’만 봐도 그렇다. ‘이어준다’는 뜻의 츠나고 단어처럼 이 연필깎이는 서로 다른 연필들을 합체시켜준다. 톰보우와 파버카스텔 등 글로벌 연필 브랜드들의 제품을 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인기가 높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뚜껑을 룰렛처럼 살짝 돌릴 때마다 1~3번 홀이 나오는데 각자 역할이 다르다.
뚜껑을 돌리면서 3개 홀을 사용할 수 있는 츠나고_출처 : 문구소녀
[츠나고 사용 방법]
- 서로 다른 연필 2가지를 준비한다.
- 1번 홀에 몽땅 연필을 넣은 후, 연필 기둥 부분에 다른 연필을 꽂을 구멍을 낸다.
- 2번 홀에 두 번째 연필 본체를 넣고, 앞서 1번 홀에서 낸 구멍에 딱 맞도록 깎는다.
- 3번 홀로 깎은 면들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이제 두 연필을 연결하면 끝!
츠나고로 2개 연필을 연결시킨 모습_출처 : 문구소녀
츠나고로 알 수 있듯 나카지마 주큐도는 통통 튀는 아이디어로 유명하다. 1933년부터 연필깎이를 제조했고, 2009년부터는 연필깎이를 아름다운 오브제로 재정의했다. 연필깎이가 생필품을 넘어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2013년 파리에서 개최한 ‘메종&오브제 2013 STYLE+’에서 첫 전시를 열었다. 당시 정육면체 아크릴 상자에 '연필깎이와 연필을 깎을 때 나오는 부스러기들'을 가득 채워 만든 작품들로 이목을 끌었다.
티티경인 '하이샤파'(2만 원대)
: 3040대 모여라!
2022년 1월, 한국에서 어느 블로그에 올라온 연필깎이 AS 후기가 화제였다. 출시된 지 무려 42년이 지난 연필깎이를 무상으로 수리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착한 서비스를 제공한 곳은 ‘티티경인’. 3040대라면 학창시절 교실에서 한 번쯤 써봤을 회색 기차 모양의 연필깎이 ‘하이샤파’를 개발한 곳이다.
1980년대 출시된 티티경인의 하이샤파_출처 : 티티경인
티티경인의 전신은 1972년 설립된 경인상사다. 2006년 자사의 크레파스 브랜드명 ‘티티파스’에서 티티를 따와 티티경인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현재는 모든 제품을 중국에서 생산 중이다. 시그니처 상품은 단연 하이샤파다. 1980년대부터 40년 넘게 생산해 온 한국의 스테디셀러 연필깎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대단하다. 문구 덕후들이 탐낼만한 아이템이다. 필자도 ‘혹시나 단종되기 전에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구매했다.
정수연(문구소녀) mungugirl@gmail.com
정리=이한규 기자 hanq@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