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보고타에도 아파트들은 있지만 한국처럼 대단지 아파트는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 아파트 이름은 나무, 꽃, 강, 산, 심지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나의 할머니는 ‘카리아리(Cariari)’라는 이름을 가진 빌딩에서 살았다. 나는 ‘카리아리’가 코스타리카에 있는 강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한국에는 큰 건물을 짓게 되면 입구에 조형물을 장식하라는 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원칙적으로는 멋진 아이디어다. 건조한 로봇 다리 앞에 예술품이라니. 문제는 나중에 건설 회사들이 자칭 예술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작품을 의뢰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것 같다. 어느 날, 한 건축업자의 친구가 자식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푸념한다. 그때 건축업자가 묻는다. “아, 미술을 전공했다고 하지 않았나? 예산이 있으니 지금 짓고 있는 건물의 입구에 아무거나 하나 만들어 줘 봐.” 대략 건축업자가 나중에 현금화할 수 있는 호의인 듯 보인다. 이 시나리오가 아니면, 미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하루를 망치는 눈엣가시 같은 조형물들이 건물 앞에 자리 잡은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이 매우 주관적인 의견이며 내가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그 작품이 다른 사람에겐 숭고하게 보일 수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도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익숙한 건물을 지나다가 내가 나름의 애정을 갖게 된 조각품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서 무척 실망했다. 하지만 그 조각은 몇 미터 앞에서 나타났는데, 건물의 위치를 착각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 조형물이 눈엣가시 같겠지만, 내 눈에는 어린이 두 명이 붙어 있는 듯한 이 조형물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두 개의 황금색 인삼 뿌리 조각이다.
가끔 궁금하다.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때 소위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이 조형물들은 다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폐기하지 말고 모두 리첸시아로 보내버리면 서로 좋지 않을까?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