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연애-육아? 리얼리티쇼로 대리만족” 초저출산 사회의 풍경[컬처 트렌드/정덕현]

입력 | 2024-02-22 23:36:00

‘매운맛’ 연애-육아 콘텐츠 인기




《한국의 출산율은 역대 최저치인 0.6명(작년 4분기 기준)으로 초저출산 기준인 1.3명의 절반 밑으로 뚝 떨어졌다. 그런데 정반대로 연애, 육아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인기다. 이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걸까.

한국은 최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방송가의 트렌드로 자리했다. 그런데 특이한 건 그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대부분이 연애와 육아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9년 네덜란드에서 방영된 ‘빅 브러더’로부터 시작된 서구의 리얼리티쇼가 주로 타인의 사생활 엿보기나 자극적인 서바이벌(이를테면 무인도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는 16인의 게임을 보여준 ‘서바이버’ 같은)을 담아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이건 다분히 한국화된 경향이다. 》





다양해지고 수위 세진 프로그램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리얼리티쇼 경향이 생긴 건 카메라가 경량화되고 영상이 일상화되면서 보다 리얼한 영상을 요구하게 된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그래서 똑같은 미디어 변화를 겪은 우리라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만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게 여전히 불편했던 한국의 시청자들에 맞춰 우리네 리얼리티쇼는 다양한 우회 전략을 썼다. 일반인 대신 연예인과 그 가족들을 출연시키고 소재도 연애나 육아 같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가져갈 수 있는 걸 선택했다. 또 리얼리티쇼보다는 다소 순화된 ‘관찰 카메라’라는 표현을 썼다.

‘사랑의 스튜디오’(1994년) 같은 고전적인 연애 프로그램은, ‘우리 결혼했어요’(2008∼2017년) 같은 연예인 버전의 가상 결혼 리얼리티를 거쳐, ‘짝’(2011년) 같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서서히 변모했다. 짝은 사실상 국내 리얼리티쇼의 태동을 알린 프로그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일반인 출연자, 그들의 내밀한 사적 대화나 행동의 ‘도촬’을 어떤 필터링 없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결국 그 자극적인 연출에 출연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폐지됐지만, 짝의 계보는 같은 연출자인 남규홍 PD가 다시 론칭한 ‘나는 솔로’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짝과는 달리 멜로드라마 같은 달달한 감정의 교류를 담아내는 ‘하트시그널’(2017년)이 등장했고, 이로써 한국형 연애 리얼리티의 두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 버전’과 ‘판타지 버전’이 완성되었다. 여기에 OTT의 등장은 보다 자유로운 수위를 가능하게 했고 연애 리얼리티는 돌싱(돌싱글즈), 이혼 부부(우리 이혼했어요), 심지어 성소수자(메리퀴어)까지 다양해졌다.

초저출산 사회 한국에서 연애와 육아를 소재로 한 리얼리티 TV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연애, 결혼, 출산을 하기 어려운 젊은층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채널A의 육아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 채널A 화면 캡처

연애가 리얼리티쇼를 정착시키는 우회 전략으로서 주력 소재가 됐던 것처럼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빠와 아이들이 캠핑을 떠나는 ‘아빠 어디 가’(2013년)로 시작해 ‘슈퍼맨이 돌아왔다’(2013년), ‘오 마이 베이비’(2014년)로 열린 육아 예능 전성시대는, 상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덜 불편한 아이를 대상으로 하면서 열리게 됐다. 물론 연예인 자녀들의 일상 공개가 주는 위화감 때문에 잠시 힘을 잃었지만, 육아 예능은 오은영 박사 같은 전문가 솔루션을 더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는 그래서 때론 자극적일 수 있는 금쪽이들의 일상이 공개되지만 그것이 솔루션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통해 허용되었다. 오은영 박사는 이후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같은 부부들의 고민 상담까지 하는 프로그램으로 영역을 넓혔는데 이처럼 전문가의 솔루션이라는 명분은 리얼리티쇼를 보다 매운맛으로 만드는 것 또한 허용하게 해줬다.



연애-결혼 포기, TV로 간접체험


연애와 육아는 최근 방송가의 가장 뜨거운 트렌드라고도 할 수 있는 소재들이다. 그런데 이 트렌드를 출산율 0.6명으로 이미 초저출산(1.3명 이하가 기준이다)을 넘어 그 절반에 해당하는 한국의 현실과 함께 떠올려보면 그저 웃고 넘길 아이러니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열풍 속에는 대중이 갖고 있는 결혼관은 물론이고 연애, 육아에 겹쳐진 현실들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결혼율이 매해 줄고 있고 실제로 청년층에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가족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바뀐 가치관의 차이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경제적인 조건이다. 치열한 취업 경쟁, 치솟는 부동산 가격, 만만찮은 비용을 요구하는 육아 현실, 임신, 출산으로 겪게 되는 경력단절 등등 이제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조차 개인 생존 차원에서 부담스러워진 현실이다. 결국 한국의 연애, 육아 프로그램 열풍은 정반대로 실제 연애와 결혼을 하기 어려운 이들의 대리충족의 의미가 더 강해졌다.




‘나의 현실과는 다르다’ 위화감


Mnet의 연애 프로그램 ‘커플팰리스’. Mnet 화면 캡처

최근 방영되고 있는 ‘커플팰리스’라는 커플 매칭 프로그램을 보면 현실적 조건들이 얼마나 결혼, 육아와 관련되어 있는가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마치 시간 낭비는 싫다는 듯 출연자들의 등장과 함께 스펙과 결혼조건들을 노골적으로 공개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뚜렷한 선택의 기준이 되는 건 외모, 인성보다 현실적 조건들이다. ‘아이 넷 원해요’라고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조건을 내세우는 남성은 단 한 표도 얻지 못하는 반면 의사, 변호사에 건물주라는 스펙의 남성들에게는 몇 표씩 데이트를 원하는 여성들이 줄을 선다. 또 ‘아이 넷 원해요’라는 조건을 내세운 남성에게는 여지없이 ‘그만한 준비는 되어 있냐’는 질문이 되돌아간다. 결혼도 육아도 현실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지만 어쩐지 사랑 같은 낭만조차 사라져버린 씁쓸함이 느껴진다.

물론 여기 나오는 출연자들은 대한민국의 평균치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상위 몇 프로의 경제력과 스펙을 가진 인물들이다. 겨우 서른 남짓 나이에 건물주이거나 의사, 변호사, 사업가 같은 이미 성공한 이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연봉 오천 남짓의 회사원 정도는 아예 평균 이하처럼 보이는 착시현상마저 일어난다. 그래서 이들을 보는 보통의 시청자들은 양가감정을 느끼게 된다. 잠깐 다 가진 듯한 출연자에 빙의되어 여러 이성에게 선택받는 걸 마치 내 일처럼 설레며 보면서 ‘그래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지’ 하며 판타지에 빠져들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선택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씁쓸한 뒷맛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SBS Plus의 연애 프로그램 ‘나는 솔로’. SBS Plus 화면 캡처

이 양가감정은 갈수록 초저출산의 사회로 가는 현실 속에서 연애, 육아 프로그램들이 최근 매워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처음에는 그래도 달달하거나 훈훈한 광경의 판타지를 원하던 시청자들은 그것이 ‘내 현실’과는 다르다는 걸 절감하면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판타지에 가까운 저들의 리얼리티에서 빠져나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건 때론 살벌한 감정 싸움과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생존경쟁(나는 솔로)이 되기도 하고, 천사 같을 줄만 알았던 아이가 육아의 현실 속에서 ‘금쪽이’가 되기도 하며(금쪽같은 내 새끼), 영원히 사랑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이 지옥이 되기도 하고(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궁극에는 함께 사는 것보다 이혼이 오히려 서로의 행복을 위해 좋은 선택이 되기도 하는(우리 이혼했어요, 한 번쯤 이혼할 결심) 그런 리얼리티다.



‘연애-육아 지옥’에 되레 위안도


혹자는 매워진 연애·육아 리얼리티는 오히려 초저출산 사회를 부추기는 면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저들의 사례를 그저 일반화해 받아들이는 데서 생기는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방송은 개별적인 사례를 다룰 뿐 그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화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출연해 올바른 시각을 만들어주는 건 중요하지만 또한 그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일반화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보다 중요해지는 건 사실상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애나 결혼, 육아 같은 것들이 어째서 감당할 만한 여력이 있어야 가능해진 현실이 되었는가를 들여다보고 이를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과 실천을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매워진 프로그램이 실제 현실로 고착화되지 않고, 대신 누구나 희망할 수 있는 삶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면.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