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텃밭 앨라배마주 대법 판결 “냉동배아 폐기하면 법적 책임져야” 일부 병원은 시험관 시술 중단 백악관, 판결 비판… 헤일리는 “ 환영”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마이어스의 한 불임 전문 병원에서 액체 질소를 활용해 냉동 배아를 보관하는 모습. 포트마이어스=AP 뉴시스
체외수정(IVF)을 위해 보관해 둔 냉동배아(수정란)도 태아로 봐야 한다는 미국 앨라배마주(州)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일부 병원이 해당 시술을 중단하는 등 혼란이 확산되고 있다. 해당 판결은 ‘시험관 아기 시술’로 불리는 체외수정을 시도하다 배아를 폐기하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미국에서만 연간 수십만 명이 이용하는 시험관 시술에 상당한 장애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번 판결을 강하게 비판하며 이를 11월 대선의 쟁점으로도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 앞서 2022년 6월 연방대법원이 연방정부 차원의 낙태권을 폐기하자 중도 및 진보 성향 유권자들이 결집하며 같은 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집권 민주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반면 야당 공화당의 대선 주자인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미국대사는 보수층 표심을 노리고 환영을 나타내는 등 이번 판결이 제2의 낙태권 폐기 논쟁으로 번질 조짐이다.
● 보수 텃밭 앨라배마 “냉동배아도 인간”
BBC방송 등에 따르면 미 버밍햄 소재 앨라배마대병원은 21일 시험관 시술로 인해 환자나 의사가 형사 기소되거나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이 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시험관 시술을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앞서 16일 주 대법원이 “냉동배아도 태아이며 이를 폐기할 경우 법적 책임이 따른다”고 판결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톰 파커 주 대법원장은 성경을 인용해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심지어 출생 이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다”며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아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이 강한 앨라배마주는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폐기한 후 주 차원에서도 전면적인 낙태 금지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더해 배아까지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강경 보수 성향 판결을 내린 것이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21년 미국 전체 출생아의 약 2%인 9만1906명이 시험관 시술로 태어났다. 통상 시험관 시술은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량의 난자를 몸 밖으로 채취해 시험관 내에서 정자와 수정시킨 후 배아 대부분을 냉동 보관한다. 임신에 성공한 부부는 그간 보관했던 배아를 기부하거나 폐기할 때가 많다.
판결이 다른 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 또한 상당하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현재 최소 11개 주가 주법을 통해 “수정 단계에서 이미 생명이 시작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앨라배마주 판결로 다른 주에서도 원정을 떠나 시험관 시술을 받아야 하는 등 불편함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각종 소송과 분쟁이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대선 앞두고 ‘제2 낙태권’ 의제 부상
낙태권 보호를 공약으로 내세운 바이든 행정부는 즉각 비판에 나섰다. 커린 잔피에어 백악관 대변인은 20일 “연방대법원이 낙태권 폐기 판결을 내렸을 때 예상했던 혼란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대법원을 비판했다.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인 연방대법원의 인적 구성과 낙태권에 비판적인 공화당 때문에 미 여성들은 임신과 관련 시술, 응급 치료와 피임 등에서 모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다만 공화당 일각에서도 이번 판결로 낙태권 논란이 고조되면 2년 전 중간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대선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찬반 양론이 뜨거운 낙태 의제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공화당에 또 다른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다고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분석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