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시민 회고-증언 바탕으로 41년의 명암 입체적으로 담아 여성 91%가 일할 권리 누리고, 대학 진학률 서독 앞지르기도 억압적 체제에서도 다채로운 삶… “잔인한 상황 속 회복력 보여줘” ◇장벽 너머/카트야 호이어 지음·송예슬 옮김/648쪽·3만3000원·서해문집
동독 사람들의 일상 1949년부터 1990년까지 존속한 독일민주공화국(DDR·동독)에는 수탈과 계획경제의 모순, 비밀경찰의 억압이 있었지만 다채로운 일상과 사랑, 분투도 존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1972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즐거워하는 베를린의 초등학생들(위 사진)과 발트해 퀼룽스보른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독 시민들(두 번째 사진), 공산주의 혁명가의 이름을 딴 카를리프크네히트 중공업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 서해문집 제공
“고모가 서독에서 보내준 청바지는 희망이었죠. 동독 옷은 거의 입지 않았어요.”
청년기를 동독에서 보낸 한 여성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래도 그는 2021년 독일 통일의 날 행사에서 ‘동독에서의 삶은 보잘것없었다는 편견’에 불만을 표했고 같은 해 퇴임식에서는 동독 시절의 노래 ‘컬러필름을 잊었니’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통일된 독일에서 16년이나 총리를 지낸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이 책은 1990년 10월 3일 사라진 독일민주공화국(DDR), 우리가 ‘동독’이라고 불렀던 국가에 대한 기록이다. 수많은 일반 시민들의 회고, 증언, 기록들이 겹겹의 층을 쌓으며 사라진 사회에 대한 입체적인 화폭을 엮어낸다.
1953년 물자 부족과 소련의 간섭에 항의하는 6월 17일 봉기가 일어났다. 고급 인력을 중심으로 300만 명 이상이 서방으로 빠져나가자 동독 정부는 1961년 장벽 설치라는 강수를 두었다. 인도적 측면에서는 잔혹했지만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우등생 서독과 비교되는 것이 불운이었을 뿐 동독도 경제적 발전을 경험했다. 국민차 ‘트라비’는 10년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었지만 1988년에는 동독 가구 절반 이상이 차를 가졌다. 평범한 가정도 차를 타고 프라하나 북쪽 해안으로 휴가를 갔다. 힘든 과거는 옛말이 됐지만 나이 들어 서독으로 친지 방문 허가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겐 없어서 못 사는 물건이 형이나 언니의 동네에선 필요 없어 버려지는 광경을 보았다.
동독 출신 영국인으로 다섯 살 때 통일을 경험했고 그 전해 베를린에서의 민주화 시위를 기억하는 저자는 ‘고향 나라’의 어두웠던 면을 감추지 않는다. 투표는 찬반 여부만을 기입하는 형식적 절차였고, 슈타지(비밀경찰)의 철통같은 감시 체제엔 최고권력자 발터 울브리히트마저 넌더리를 냈다. 서방의 풍요를 간신히 따라 하려 노력했지만 커피 조달조차 쉽지 않았다.
이 나라가 간직했던 일부 밝은 면도 이 책은 제시한다. 여성 91%가 근로에 참여했고 아이들은 양질의 공공시설에 맡겨둘 수 있었다. 대학 진학률도 서독보다 훨씬 높았고 대학생 3분의 1은 노동계급 자녀들이었다. 1960년대 이후 이 나라의 삶은 ‘지루하고 안온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주류 소비량이 서독보다 두 배 높았던 것도 ‘삶이 견딜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다는 설명이다.
울브리히트의 뒤를 이은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1972년 군대 시찰 도중 ‘서독은 외국이다’라고 선언했다. 2년 뒤 그는 ‘헌법에서 독일 민족이라는 표현을 지우라’고 명령했다. 그 16년 뒤 그의 국가는 소멸했다. 우리는 언제쯤 ‘과거의 반쪽’에 대한 미시적이고 종합적인 평가가 가능할까.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