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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면 팔팔합니다”… ‘야신’ 김성근 감독이 왕정치 회장에게 한 말[이헌재의 인생홈런]

입력 | 2024-02-25 12:00:00


김성근 감독이 지난해 11월 한국시리즈 5차전 앞서 시구를 하고 있다. 82세인 김 감독은 야구장에만 서면 여전히 청춘이다. 뉴스1



2월초 일요일 이른 아침 시간.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82)은 어김없이 야구장에 나와 있었다. 그는 경기 성남 대원중학교 운동장 한 켠에서 야구 예능프로그램 ‘최강야구’에 출연하는 아마추어 선수 두 명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팀은 이대호, 정근우, 박용택, 이대은 등 한국 프로야구 무대를 주름잡았던 은퇴 선수들이 주축이다. 그렇지만 독립리그나 대학 야구에서 뛰는 선수도 꽤 있다. 이들 중 정현수(롯데), 황영묵(한화), 고영우 원성준(이상 키움) 등이 실력을 키워 지난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김 감독은 “6명이 프로에 지원했는데 두 명은 프로에 못 갔다. 집에서 이틀 동안 고민했다. 결론은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거였다”며 “작년 추석 때도 불러서 훈련을 했다. 10~20년 지난 후 나 때문에 인생 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설혹 (프로 진출이) 안되더라도 지금의 노력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 예능 최강야구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포수 박찬희의 송구 동작을 지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야구의 열정에 불탄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다. 티 배팅 때 선수들에게 직접 공을 올려주고, 토스 배팅 때는 공을 가볍게 던져준다. 그리고 지금도 선수들에게 펑고(수비 훈련을 위해 쳐 주는 땅볼)를 쳐 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펑고의 달인’이다. 노크 배트를 잡으면 자유자재로 공을 친다. 야수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뻗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코스로 공을 보낸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펑고를 쳤으니 거의 60년간 이어왔다. 하루 1000개씩 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김성근표 펑고’로 성장한 대표적인 선수가 SSG 3루수 최정과 당대 최고의 2루수 정근우였다. 김 감독은 “내야수라면 가볍게 공을 잡아야 한다. 힘이 들어가면 글러브에서 공이 튕겨나가기 일쑤다. 1000개씩 잡다보면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인다. 힘이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공을 잡아낸다. 힘을 뺀 상태에서 편안함을 찾는 게 바로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그렇게 기술을 연마하는 걸 혹사라고 한다. 어림도 없이 이야기다. 지금 메이저리그 최고의 내야수가 된 김하성(샌디에이고) 역시 하루 1000개, 2000개 씩 받으면서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한화 감독 시절의 김성근 감독이 이를 악물고 펑고를 치고 있다. 한화 제공


김성근 감독의 펑고를 받고 있는 당시 한화 2루수 정근우. 유니폼이 흙투성이가 될 때까지 펑고는 멈추지 않았다. 한화 제공



김 감독은 대화 내내 손을 가만히 있지 않고 악력기를 끊임없이 움직였다. 왼손으로 수십 번 쥐었다 폈다 하다가 힘이 빠졌다 싶으면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2시간 가까이 한 인터뷰 동안 그는 쉴 새 없이 악력기를 쥐었다 폈다 했다. 그는 “펑고를 제대로 치려면 손아귀에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엔 일구이무(一球二無)란 말이 있다. 한 번 떠난 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치는 펑고 역시 마찬가지다. 펑고 하나하나마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는 “훈련이 되는 펑고를 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실전과 같은 타구처럼 만들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들어가면 뭔가가 보이게 된다”며 “현재 많은 팀들이 그냥 치고, 그냥 잡는다. 쉽게 잡을 수 있는 펑고에 무슨 의미가 있나. 힘들게 치고, 힘들게 잡아야 자기 것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타격 역시 마찬가지. ‘국민타자’였던 이승엽 두산 감독은 2004년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에 진출한 뒤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지바 롯데는 김 감독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승엽과 김 감독은 그날부터 하루 1000개의 스윙을 했다. 원래 갖고 있던 재능에 그같은 노력이 뒷받침되자 이승엽은 다시 홈런 타자로 부활할 수 있었다.

2005년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 시절 스승과 제자에서 2022년 감독 대 감독으로 만난 김성근 감독(왼쪽)과 이승엽 두산 감독. 동아일보 DB



재일동포 출신인 그는 이같은 열정 하나로 한국 프로야구에 큰 획을 그었다. 그가 감독을 맡은 한국 프로 팀만 7개(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 한화)다.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감독도 했고,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은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뱅크스에서 5년간 코치 고문으로 일했다.

현역 선수 시절 868개의 홈런을 친 오사다하루(왕정치) 소프트뱅크 회장이 그를 유독 아꼈다. 김 감독은 “1940년생인 왕 회장이 나보다 두 살 위다. 왕 회장이 나만 보면 ‘김 상은 팔팔해서 좋겠다. 나는 힘이 없다’고 농담을 하신다. 그럴 때마다 ‘회장님도 운동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 둘 모두 ‘야구장에만 있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가장 편하다’라며 의기투합한다”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운동에 진심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하려면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한다. 집이 있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서울숲 주변을 2시간 가량 걷는다. 근력 유지를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도 꾸준히 한다. 그는 “시간이 되는 대로 걸어다니려 한다. 집에도 이런저런 운동 기구가 5, 6개 있다. 아침에 걷지 못할 때는 집에 있는 사이클 기구로 유산소 운동을 보충한다”라고 했다.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틈틈이 과일이나 나무, 꽃, 선수 이름 등을 노트에 적곤 한다. 평소부터 메모 습관이 있었던 그이지만 요즘은 가능한 한 더 많이 뭔가를 적으려 노력한다.

김성근 감독은 인터뷰 내내 악력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펑고를 치기 위해서는 손아귀 힘이 떨어져선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성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2022년 말 한국에 돌아온 뒤엔 일본 소프트뱅크에서 일할 때보다 체중이 5,6kg정도 빠졌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체중이 80kg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는 “코치 고문으로 일하다 보니 일본 코치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적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맥주 한잔 해가며 야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새벽 3, 4시가 되어 있곤 했다”며 “그래도 나는 다음날 아침이면 거뜬히 일어나 운동을 했다. 일본인 코치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온 뒤로는 저녁 술자리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체중도 줄었다. 스스로도 가능한 한 음주를 자제하려 한다. 하지만 지난 연말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두 번 있었다. 2000년 대 초반 지도했던 LG 트윈스 선수단 망년회와 2000년해 후반 SK 와이번스 왕조 시절 멤버들과의 자리였다.

피를 말리는 승부의 세계에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그도 여러 차례 큰 병을 얻었다. 1990년대 말 쌍방울 감독 시절 신장암 수술을 했고, SK 감독으로 재임할 때도 신장암 수술 한 번, 간암 수술 한 번을 했다.

그는 “처음 신장암 수술을 서울삼성병원에서 했다. 그런데 그곳 복도에서는 서울 잠실야구장이 보인다. 수술한 뒤에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야구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며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건강은 곧 의식이라는 것이다. 아프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된다. 하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니 아프다, 죽는다는 의식이 없어졌다”고 했다.

‘실패의 아이콘’에 가까웠던 김성근 감독은 60대 중반 SK 와이번스에서 생애 첫 우승 감독이 됐다. 그는 SK를 3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으며 왕조 시대를 열었다. 동아일보 DB



첫 번째 암수술을 받은 뒤 그는 건강검진의 증요성을 절감했다. 이후엔 몸이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병원을 찾는다. 이후 두 번의 암도 조기에 발견하면서 큰 후유증 없이 성공적으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암수술을 받을 때마다 구단이나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했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당시엔 경쟁 속에 있을 때니 상대에게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며 “간암 수술은 정말 너무 아팠다. 하지만 아픔을 참고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경기장에 갔다. 수원에서 열린 그 경기에서 결국 이겼다”며 웃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할 때가 됐다고 했다. 그는 “요즘 한국 사회는 나이에 너무 민감하다.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계속해야지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그만둘 이유가 없다”며 “내게도 나이와 관련된 편견이 항상 따라다녔다. 하지만 내가 SK 와이번스에서 처음 우승한 게 65세 때였다. 마지막 우승은 69세 였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이기는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야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어떤 조직이든 리빌딩과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기준은 나이가 아닌 성장하려는 의식이 있는가의 여부여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그는 ‘인생은 순간이다’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야구와 인생을 정리했다. 갖고 간 책에 사인을 요청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 줬다. 一球二無.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