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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의 포탄상자 수탈사건

입력 | 2024-02-25 23:36:00


지난해 10월 중순 북한 각 기관, 기업소의 노동당 책임자와 행정 책임자들이 밤 10시에 시군 당위원회에 긴급 호출됐다.

이들에게 하달된 것은 최고사령관 명의의 긴급 명령이었다. 내용은 학생과 연로보장(은퇴) 노인을 제외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24시간 안에 포탄 상자 2개씩을 만들어 바치라는 것이었다.

주성하 기자

당위원회에선 포탄 상자 견본품까지 보여주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작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상자의 규격은 가로 30cm, 세로 120cm, 높이 30cm로, 직경 120mm 이상의 포탄 2발과 장약을 넣을 수 있는 크기다. 또 포탄 상자는 무조건 폭 15cm, 두께 1.5cm의 이깔(잎갈)나무 판자로 제작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명령이 하달된 순간부터 전국에서 이깔나무 판자가 순식간에 동나기 시작했다. 목재 가공 공장과 가공업자들이 발 빠르게 시장에서 이깔나무 판자와 목재를 사들였다. 그리고 밤새 포탄 상자를 제작했다.

뒤늦게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갔을 때에는 이미 해당 규격의 포탄 상자 2개가 중국 돈 500위안(약 7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직접 만들기도 어려웠다. 아침에 해당 규격의 판자는 m당 2.8달러에 팔렸고, 이걸 사서 목공에게 부탁해도 자재값만 28달러에 가공비 5달러가 붙어 33달러나 들었다. 시장에서 포탄 상자 2개를 사는 것과 비교하면 차액은 고작 4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명령은 독재적이고, 하달 방식은 사회주의적인데, 집행한 사람들은 완벽하게 시장경제의 논리로 움직였다.

허나 아무리 최고사령관의 명령이라고 해도 없는 이깔나무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남성들은 명령을 수행한 자와 수행하지 못한 자로 나뉘었다. 당연히 후자는 두고두고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한다.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렇게 모은 포탄 상자가 전국적으로 약 200만 개라고 한다. 명령이 하달된 시점은 북한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포탄 지원을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70달러면 북한 일반 4인 가정이 최소 두 달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이다. 북한 인민의 고혈을 짜낸 수제 포탄 상자는 지금쯤 어느 우크라이나 벌판의 진창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포탄 상자 수탈 사건은 북한의 위선과 허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김정은은 지난달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지방 인민들에게 기초식품과 식료품·소비품을 비롯한 초보적인 생활필수품조차 원만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며 반성하는 척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며 울먹인 적도 여러 차례다. 민심이 악화되면 인민들에 대한 수탈을 하지 말라며 몇몇 간부를 본보기로 호되게 처벌하는 척하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인민이 두 달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을 24시간 만에 꿀꺽하고 입을 싹 씻었다.

포탄 상자도 생산할 능력이 없어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전국 남성들이 톱과 망치를 들고 뛰어다녀야 하는 게 현실이지만 김정은은 정찰위성을 쏘고 핵잠수함을 만들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다. 새해 들어서도 연일 신형 미사일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시험발사 사진을 공개했고, 군수공장에 찾아가 수많은 미사일과 발사 차량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뿌렸다. 지금 북한의 군수산업은 김정은이 허세를 부릴 수 있는 몇몇 샘플용 무기 제작과 러시아에 보낼 탄약 제작에 모든 걸 쏟고 있다.

최근 김정은이 전쟁을 운운하며 연일 대남 강경 발언을 내뱉고 있지만, 정작 헐벗은 북한 군인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고 있다. 연료 부족에 기갑부대와 함정들은 대책 없이 녹이 슬고 있고, 공군 비행기는 추락이 무서워 훈련도 못 하고 있다.

일각에선 김정은이 정말 전쟁을 벌이려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지만, 쓸데없는 기우이다. 제대로 전쟁 준비를 하기도 전에 북한 인민들부터 죽어갈 것이다. 탄약 상자는 물론 비상식량을 만들어 내라, 장갑을 내라, 군화를 내라, 디젤유를 내라 등과 같은 지시가 수십 번 넘게 떨어질 것이다. 심지어 총포를 닦을 천까지 내라고 할 것이다. 이건 개인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 북한에서 이미 다 일어났던 일이다.

이런 군대를 갖고 김정은은 “남조선 영토 평정”을 운운하고 있다. 말라갈수록 허세는 거꾸로 커지기만 하는 게 참 안쓰럽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