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 붕괴 34년 만에 최고 찍은 日 증시 엔저-기록적 기업 실적이 상승 동력 韓, 日 본뜬 ‘기업 밸류업’ 오늘 발표 투기자본 ‘먹튀’ 판 깔아주는 일은 없어야
천광암 논설주간
작년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던 일본 닛케이평균주가가 22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버블 붕괴 후 34년 만이다. 미국 증시가 1929년 대공황에서 회복하는 데 걸린 25년보다 9년이 더 걸렸다.
닛케이평균주가가 직전 최고치를 기록했던 1989년 12월은 일본이 미국을 발아래로 보던 시절이다. 세계 10대 부자 10명 중 6명이 일본인이었고, 세계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32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었다. 닛케이평균주가는 20년간 줄곧 하향곡선을 그린 끝에 2009년 3월에는 ‘5분의 1 토막’ 아래로까지 떨어졌다. 이후 세계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도쿄증시도 회복세로 돌아섰지만, 거품 붕괴 이전 주가를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오죽했으면 절대 열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쇠 관뚜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오늘 발표를 뜯어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정부 관계자 발언과 보도를 종합해 보면 ‘기업 밸류업 정책’에는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등을 압박, 유도 또는 독려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일찌감치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일부 기업을 대상으로 배당 확대를 요구하는 ‘선전포고문’까지 보내둔 상태다. 늑대가 떼를 지어 사냥감을 공략하는 것처럼, 여러 개 펀드가 연대해서 하나의 기업을 먹잇감으로 삼는 ‘울프 팩(wolf pack·늑대 무리) 공세’가 본격화할 움직임도 보인다.
일본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친화적 경영 강화 노력이 도쿄증시 상승세에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도쿄증시가 34년 만에 무쇠 관뚜껑을 열어젖힌 본질적인 동력은 엔저와 기업 경쟁력에 바탕을 둔 ‘기록적인 실적’에서 나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이다. 1989년 당시 시총 상위 10대 종목을 보면 거품 자산으로 덩치만 잔뜩 키운 은행과 증권사가 7개였다. 그나마 나머지 2개는 준(準)공기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차, 반도체 장비, 콘텐츠, 상사, 투자, 화학, 패션 부문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이 골고루 포진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요 몇 년 경영 실적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도쿄증시프라임에 소속된 상장 기업들의 경우 ‘작년 4월∼올 3월 결산’에서 3년 연속 순이익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에는 작년이 무척 힘든 한 해였다. 12월 결산 코스피 상장법인 613개사의 작년 1∼9월 연결기준 순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나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배당은 기업의 성장잠재력을 훼손해서, 장기적으로 주주는 물론 국가 경제에도 독이 된다.
윤 정부가 벤치마킹하려는 일본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흔히 일본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발선으로 꼽는 것이 2014년 발표된 ‘이토 보고서’다. ‘지속적 성장을 위한 경쟁력과 인센티브―기업과 투자자의 바람직한 관계 구축 프로젝트’가 공식 명칭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학자 및 연구원 13명, 기업 임직원 26명, 금융투자업계 임직원 9명이 멤버로 참여했고 논의와 토론에 1년이 걸렸다. 민간이 논의의 중심이 됐고 일본 정부와 증권 당국은 지원과 옵서버 역할에 충실했다.
이런 숙고와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만들어져 나온 정책은 장기적으로 효과를 갖기 어렵다. 윤 정부가 한국 현실에 맞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책’을 마련하려면 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 무엇보다 외국 투기자본의 ‘먹튀’를 위해 정부가 판을 깔아주는 일만큼은 두 번 다시 없기 바란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