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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울과 흙인형이 밝혀낸 신분, 어린 왕자[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4-02-26 23:33:0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올해는 경주 금령총 발굴 100주년이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긴급 예산을 투입해 특별히 발굴한 이 무덤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기마인물형 주자(注子), 보물로 지정된 금관과 금허리띠 등 신라사 해명에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이 무덤의 경우 신라 단독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봉황대 고분에 딸린 중형급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왕릉 출토품에 준하는 수준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이 무덤 주인공은 과연 누구이기에 그간 발굴된 신라 무덤 가운데 다섯 혹은 여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고급 물품을 무덤에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일까.

신라 금관 발굴 ‘특별 프로젝트’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현 노서동)에서 세기의 발견이 있었다. 집주인이 건물 신축을 위해 땅을 파던 중 황금 유물이 드러난 것인데, 그것을 고고학자가 아닌 지역 문화계 인사들이 마치 고구마 캐듯 서둘러 수습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가 많이 사라졌지만, 단편적 기록으로 전해지던 ‘황금의 나라, 신라’가 사실임이 밝혀졌다.

경주의 문화계 인사들은 또 다른 금관을 찾기 위해 발굴 대상지를 물색했다. 그들이 지목한 것은 봉황대 고분 남쪽의 폐고분 2기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에 발굴을 요청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1924년 4월 지방 순시차 경주를 찾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만나 무덤 발굴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금관총을 예로 들면서 봉분이 이미 훼손되었으므로 조금만 파면 금관을 비롯한 유물이 쏟아질 것이라는 솔깃한 주장을 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이토가 발굴조사를 지시하자 조선총독부는 조사팀을 꾸려 다음 달 바로 발굴에 착수했다. 총독부 직원들이 막상 발굴을 시작하고 보니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유물이 묻힌 목곽과 목관이 지표 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에서는 무덤 주인이 왕족임을 드러내는 금관, 금허리띠와 함께 특이하게도 여러 개의 금방울이 발견됐다. 금령총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5월 22일 정오,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함께 금방울 2점이 드러났다. 금허리띠는 금관총에서도 출토되었기에 발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금방울은 매우 특이한 사례였기에 조사원들도 깜짝 놀랐다. 이 금방울로 인해 이 무덤은 후에 금령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5월 28일에는 기대하던 금관이 머리 위치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다만 금관총 출토품에 비하여 크기가 작고 비취로 만든 곡옥이 부착되지 않은 간소한 모습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금관 아래쪽에도 정교한 금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기마인물형 주자, 국보가 되다

경북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돼 국보로 지정된 기마인물형 주자. 완벽한 조형미와 세밀한 묘사도 훌륭하지만, 신라인들의 옷, 말 장식과 같이 신라 생활사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물이다. 왼쪽은 의관을 갖춰 입은 주인, 오른쪽은 그를 따르는 시종이다.

금방울과 금관 발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5월 29일 로만글라스 2점과 기마인물형 주자 2점이 출토되었다. 로만글라스는 지중해 연안 동로마 식민지에서 제작되어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귀한 물품이고, 기마인물형 주자도 유례가 없는 특이한 유물이다.

1962년 정부는 기마인물형 주자를 국보로, 이듬해 금관을 보물로 지정했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이 금관보다 기마인물형 주자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한 것은 이 토기들이 지닌 완벽한 조형미와 더불어 그것이 신라 생활사 해명의 결정적 단서가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우 고구려와 달리 고분벽화가 없어 신라인의 복식이나 생활 모습을 추정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기마인물형 주자는 그런 아쉬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 주었다. 특히 주인상은 누군가를 모델로 만든 듯 표정이나 복식, 말 장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세밀하다.

신라 사람들은 왜 이처럼 특이한 토기를 만들어 무덤에 넣어둔 걸까. 이 2점의 토기는 흙인형으로서도 가치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즉, 말의 몸통 속이 비어 있고 엉덩이 위쪽으로 액체를 담은 다음 앞쪽 주구로 따를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그렇다고 하여 일상생활에서 이 토기를 주자로 썼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색하다. 통상의 주자와 달리 손잡이가 없고, 크기가 다른 토기 2점을 정교하게 만든 점으로 보면 장례용일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주인상은 의관을 갖추어 입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인데 표정이 어둡다. 그에 비해 시종상은 일상의 거친 옷을 입고 방울을 흔들면서 누군가를 안내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허리띠, 장식대도 등 유물 크기가 작은 점이 눈에 띈다. 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해 무덤의 주인공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신라 왕자로 추정한다.


어린 왕자를 위한 성대한 장례
무덤 주인공의 신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은 금관과 금허리띠다. 일제강점기 이래 수천 기의 신라 무덤이 발굴되었지만 금관은 5점, 금허리띠는 6점만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왕의 직계 가족만이 제한적으로 소유하는 물품이었다.

학계에서는 금령총이 천마총과 비슷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 시기의 신라왕은 지증왕이고 그의 선왕은 소지왕인데, 두 왕의 능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인 봉황대나 서봉황대 고분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금령총은 그 가운데 봉황대 고분에 딸린 무덤이므로 소지왕 혹은 지증왕의 직계 가족일 가능성이 있다.

금령총 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들은 왜 이토록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한 것일까.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신라 사회에서는 사후에도 현세의 삶이 고스란히 이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가 생전 사용한 물품과 함께 사후 사용할 물품까지 만들어 가득 넣어 주었다. 그리고 신라 왕족들은 장례식 매뉴얼에 따라 무덤 터 선정부터 최종 제사에 이르기까지 정성스레 장례를 준비하고 또 거행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장례는 곧 정치였기에 비록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더라도 최고의 격조로 장례를 거행했을 것이다.

이처럼 금령총에서 드러난 다양한 유물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신라 왕족의 장례 풍습, 그 시기 신라인의 모습, 공예 기술, 국제 교류의 양상을 품고 있는 소중한 사료다. 장차 새로운 연구를 통해 이 무덤에 깃든 신라 사회의 여러 면모가 차례로 밝혀지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