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소련을 상징했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그는 공산당의 억압을 자신의 작품 속에 숨겨둔 교묘한 풍자로 피하며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쌓아 나갔다.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다가오는 4월, 서울은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설계한 음향으로 뜨거울 것이다. 4월 3일 서울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에서 여섯 개나 되는 오케스트라가 그의 교향곡 15곡 중 8, 10, 11, 13번 등 네 곡과 협주곡 여섯 곡 중 세 곡을 연주한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4, 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정기연주회 메인 프로그램으로 그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올렸다.
쇼스타코비치는 생전 ‘나는 러시아 음악 역사상 두 번째 유로디비(юродивый)라네’라고 말했다. 유로디비란 바보인 척하는 예지자(叡智者)를 뜻한다. 수도승 또는 광대의 모습을 띠며 풍자를 이용해 권력과 억압을 조롱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생전 소련의 문화적 역량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선전됐고 그의 작품들은 공산권을 넘어 서유럽과 미국에서도 널리 연주됐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을 ‘풍자 광대’라고 불렀을까.
1936년 1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최고 권력자 스탈린이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이 작품의 새로운 음악적 문법이 귀에 거슬렸던 데다 여주인공이 시아버지를 독버섯으로 독살한다는 설정도 암살의 공포에 시달리던 스탈린을 자극했을 것이다.
숨죽인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교향곡에 착수했다. 곡은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완성됐고 1937년 11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이 초연했다. 연주가 끝나자 교향곡 자체 길이에 가까운 40여 분의 갈채가 쏟아졌다. 관영 비평가들은 이 곡에서 쇼스타코비치가 ‘개인주의적 혼돈과 형식주의 실험으로부터 자기를 구했다’고 썼다. 소련은 이 작품에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부여했고 새 교향곡은 3년 내 소련 전역에서 연주됐다.
권력과 비평가들을 만족시킨 것은 4악장의 뜨겁고 장려한 피날레였다. 이 부분은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 사후 그의 지인이었던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가 서방으로 나와 쓴 책 ‘증언’(1979년)은 다른 얘기를 담고 있다. 볼코프는 쇼스타코비치가 이 피날레에 대해 “군중이 몽둥이로 맞고 부들부들 떨며 시키는 대로 ‘우리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며 행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유로디비’로서 쇼스타코비치의 풍자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승전한 1945년, 소련 당국은 영웅적이고 축제 같은 교향곡을 기대했지만, 그는 우스꽝스러운 행진곡으로 시작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교향곡 13번 ‘바비야르’(1961년)는 외면상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규탄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는 소련 체제 내부에도 유대인 차별이 상존함을 고발하며 ‘빅엿’을 먹인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두 번째 유로디비로 여겼다면 첫 번째는 누구였을까. 제정 러시아에서 ‘벼룩의 노래’를 쓴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1839∼1881)였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왕이 벼룩과 함께 살고 있었다. 왕자보다 더 귀여워했다. 재봉사를 시켜 벼룩의 비단 외투를 만들게 했다. 벼룩은 훈장을 달고 부하들을 데리고 다닌다. 왕비와 시녀를 가리지 않고 문다. 가렵고 따가워도 손대지 못한다. 하하하.”
소련의 영광은 사라졌고 ‘바보인 척한 예지자’ 쇼스타코비치의 명예는 살아남았다. ‘가장 잔인한 달’ 4월에 잔인했던 그와 소련의 진실을 그의 뜨거운 음악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