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미 텍사스주를 나란히 방문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 사진)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P 뉴시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텍사스 최남단에 있는 브라운스빌을 찾고, 같은 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국경장벽 설치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던 이글패스에서 연설할 예정이다. 이달 초 국경 강화 법안과 우크라이나 지원 등을 담은 ‘안보 지원 패키지 예산안’이 공화당의 반대로 하원에서 좌초된 만큼, 두 사람은 이날 약 520km 거리를 둔 채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비난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은 최남단 도시로, 트럼프는 국경장벽 상징으로
백악관 관계자는 26일 “바이든 대통령이 29일 텍사스에서 국경순찰대원과 법 집행 당국 관계자 등을 만나 상원 초당적 국경 안보 협정을 통과시켜야 할 긴급한 필요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달 7일 국정연설을 정확히 일주일 앞두고 가장 ‘핫한’ 지역을 찾는 것에 대해 NBC 방송은 “이번 방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국경도시를 찾는 것은 취임 후 두 번째다. 지난해 1월 텍사스주 엘패소를 방문했을 당시엔 이주민 임시요양센터를 방문했지만, 이주민을 보거나 만나는 모습은 공개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26일 “이번엔 직접 이민자를 만날 것이냐”는 질문에 “미리 얘기하지 않겠다”라며 즉답을 피했다.
지난해 7월 텍사스주가 리오그란데 강에 설치하는 부표 국경선을 작업자들이 조립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의 법무부는 이를 불법으로 단정하고 그레그 애벗 주지사를 상대로 철거를 요구했다. 이글 패스=AP 뉴시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찾는 이글패스도 역시 공화당 입장에선 상징적인 장소다. ‘멕시코의 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는 불법 이민자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소속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지난해 이곳에 ‘수중 장벽’을 설치했다가 결국 법원으로부터 철거명령을 받기도 했다.
바이든, 공화당 반대로 ‘안보 패키지’ 무산되자 공세 전환
국경 이슈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자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핵심 슬로건이다. 지난달 NBC뉴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경 문제를 더 잘 처리할 대통령 후보’를 묻는 질문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란 응답은 57%에 이르렀다. 바이든 대통령(22%)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수치다.백악관은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을 우회하기 위해서 행정명령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일주일 동안 하루 평균 5000명 이상의 이주민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건너려고 할 경우 국경을 폐쇄하는 등의 행정명령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AP통신에 따르면 29일 방문 때 행정명령 관련 내용을 발표하진 않을 전망이다.
멕시코 국경 넘어온 불법 이민자 ‘사상 최다’
지난해 10월 리오그란데 강을 통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넘어온 이민자들이 미 텍사스주 이글 패스에서 세관과 국경순찰대의 허가 절차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글 패스=AP 뉴시스
멕시코 국경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자 수는 최근 급격히 늘어났다. 지난해 12월 30만2000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미국으로 불법 입국하다 억류된 이민자 수 역시 630만 명이 넘어 역대 행정부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는 2021년 팬데믹 봉쇄가 해제되면서 그간 억눌린 수요가 터져 나온 영향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영국 BBC 방송은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기조가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소 완화되면서 브로커들이 기회를 틈타 이민자들에게 서둘러 국경을 넘도록 부추긴 측면도 크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선거를 앞두고 이민 문제에 관해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줄곧 높여왔다. 민주당과 수개월간 협상해 내놓은 안보 지원 패키지 예산안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반대 의사를 밝히자마자 엎어버렸다. 이달 초에는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국토안보부 장관에 대한 탄핵 시도에 나서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민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공화당의 우위를 넘어서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다만 민주당 내부에서도 강경기조에 대한 반발이 있는 데다 지난달 불법 이민자가 지난해 12월 대비 절반가량으로 줄어든 만큼, 수위 조절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역사상 최대규모 추방 작전” 재차 공약
지난해 11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미국 텍사스주 에딘버그의 사우스 텍사스 국제공항에서 텍사스 공공안전부(DPS) 대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 에딘버그=AP 뉴시스
26일 바이든 대통령의 일정이 보도되자, 먼저 텍사스 방문 일정을 공개했던 트럼프 캠프는 “바이든의 조련사들이 그를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보내는 것은 자신들이 현재 크게 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조롱했다.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은 성명에서 “미국인들은 바이든이 역사상 최악의 이민 위기와 미국의 모든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범죄 위기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내가 대통령이 되면 즉각 국경을 봉쇄하고 취임 첫날부터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범죄자 추방 작전을 시작할 것”이라며 고강도 반(反)이민 공약을 재차 강조했다. 최근 베네수엘라 출신 불법 이주민이 미국인 여학생을 살해한 사건을 거론하며 “그녀의 생명을 앗아간 괴물은 2022년에 불법 입국했으며 어린이를 다치게 한 뒤 2022년 뉴욕의 좌파 민주당에 의해 풀려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불법 이민자들이 “미국의 피를 오염시킨다”고 말하는 등 가혹한 언사를 동원해 불법 이민에 대한 강경 대응을 자신의 ‘브랜드’로 굳히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겐 미 국적을 자동 부여하는 ‘출생 시민권제’ 폐지와 대규모 불법 이주민 추방 등의 반 이민 정책을 공약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