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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병원 남은 전공의 “나는 우매한 의사입니다”

입력 | 2024-02-29 03:00:00

“미용의료 돈도 더 벌고 편하지만
나까지 빠지면 응급실 어려워져”




“숭고한 소명의식 같은 게 아닙니다. 저까지 빠지면 응급실 운영이 더 어려워지니 병원에 남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최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김승현(가명) 씨는 다음 달부터 한 종합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임의(펠로)로 일할 예정이다. 20일부터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이 대거 병원을 이탈했을 때도 김 씨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달부터 함께 전임의로 일할 예정이었던 동료 중 3분의 2 이상이 ‘임용 포기 서약서’를 쓰고 병원을 떠났지만 김 씨는 계속 병원에 남기로 했다.

그는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전임의를 시작하면 원래 목표였던 연구와 기술 습득보다 전공의 업무만 대신하다 끝날 가능성이 크다. 동료들은 물론 교수님까지 말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도 병원을 지키기로 한 건 “의료 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응급실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실려 온다. 난동 부리는 취객은 정말 싫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우리는 이런 감정을 바이탈(필수의료) 병’이라고 부른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을 “우매한 의사”라고도 했다. 응급의학과 같은 필수의료 과목이 아닌 미용 등 비필수 분야를 선택하는 게 의사 개인에게 훨씬 현명한 선택이란 뜻이다. 김 씨는 “미용 의료를 선택하면 힘들게 4, 5년간 전공의 수련을 받지 않아도 되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도 챙길 수 있다. 돈도 더 벌고, 법적 책임을 질 일도 적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바이탈 병’ 때문에 결국 응급실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군중심리 휘둘린 의사들 아쉬워… 정부도 의대 증원 유연해져야”

[의료 공백 혼란]
응급실 남은 전공의
“전공의들 정책 읽어봤는지 궁금… 남은 의사는 과로에 사고날까 걱정”
“의대 2000명 증원 경직된 의사결정… 정책 효과 평가하며 유동적 조정을”

김 씨는 정부의 의대 입학정원 2000명 증원에 대해선 “찬성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전공의들의 집단 행동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병원이) 한 달을 못 버틸 것’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상황을 아는 의사들이 의료 현장을 떠나는 건 병원에 남은 의사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떠안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 상태라면 의료 체계가 무너질 게 뻔하다. 사직한 전공의들도 그런 파국을 원하는 건 아니지 않겠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 “2000명 증원 지나쳐… 정부는 유연성 보여 달라”
김 씨는 정부에 대해 아쉬운 점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그는 “먼저 의사 부족에 대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며 “설사 의사가 1만 명 부족하다고 해도 정부가 발표한 정책 패키지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필수의료 의사 부족 현상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리고 “정부가 2000명씩 5년간 증원 방식으로 추진하는 건 경직된 의사결정 같다”며 “정책 효과를 평가하며 의대 정원을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0명을 한 번에 늘릴 경우 이들을 수용할 만한 교육 여건이 되는지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김 씨는 “현재도 의학 교육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며 “대학병원에서 실습하는 의대생들을 전공의들이 가르치고 있다.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병원을 떠난 전공의를 처벌하거나 근무를 강제할 근거도 부족하다고 봤다. 그는 “원칙적으로 피교육자인 전공의가 병원에서 핵심 인력 역할을 해선 안 된다”며 “공익을 위해 직업의 자유를 제한할 순 있다고 해도 전문의부터 하는 게 맞다”고 했다.

● “군중심리로 병원 이탈했나 돌아봐야”
김 씨는 확고한 주관 없이 ‘군중심리’에 휘둘린 병원을 이탈한 일부 전공의에 대해서도 아쉽다고 했다. 그는 “전공의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자유”라면서도 “정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고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직접 판단하는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에 남은 의사들이 과로에 시달리다 의료 사고가 발생해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점이 지금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김 씨는 “(전공의 이탈로)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응급실에 환자들이 밀려들다 문제라도 발생하면 고스란히 ‘내 책임’이 될 것 같아 솔직히 두렵다”고 말했다.

인터뷰 당일인 27일 정부는 필수의료 분야에서 중상해 사고가 발생한 경우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사망 사고가 발생해도 처벌을 경감하겠다고 밝혔다. 김 씨는 “의료 사고는 결국 병원들이 돈 안 되는 필수의료진을 적게 뽑아 발생한다. 필수과목 수가(진료비)를 대폭 인상하되 병원들이 필수의료진을 더 많이 뽑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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