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고법 판결문으로 본 3·1운동 평범한 농민-교사-부인 등 참여 “인도와 정의에서 우러나온 것” 일제 법정서 독립운동 정당성 강조
3·1 만세운동 첫날인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군중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평범한 민초들도 민족의식에 입각해 주체적으로 시위에 나선 사실이 당시 판결문 등에서 확인된다.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3월 10일 오후 4시경 황해도 서흥군 능리시장. 인근 마을 주민 200여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앞서 9일 전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촉발된 3·1만세운동이 황해도까지 번진 것이다.
만세 시위는 기독교 전도사 김성항이 민족대표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평양에서 받아 오면서 계획됐다. 시위 전날인 3월 9일 이를 눈치챈 헌병대가 오후 6시경 김성항을 비롯한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하지만 다음 날 서당 교사 김두성 등이 송화리에서 주민들을 모아 계획대로 만세운동을 강행했다. 근처 소사리 주민들도 합류한 상황에서 장터를 찾은 이들까지 현장에서 가세했다. 이날 미리 대기한 일제 헌병과 경찰이 무기를 휘두르며 시위를 진압했다.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주민들도 검거됐다. 주동자로 검거된 14명은 1, 2심 법원을 거쳐 6개월에서 2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이에 불복해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결국 기각됐다.
동아일보가 3·1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아 1919년 6월 19일 일제 고등법원이 작성한 판결문에서 확인한 당시 상황이다. 판결문에서는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민초들도 민족의식에 입각해 주체적으로 시위에 나선 사실이 확인된다.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검거된 농민 민응식(당시 24세)은 “파리평화회의에서 다룬 민족자결주의를 신문 보도로 봤다. 독립선언서를 통해 조선 독립이 바야흐로 달성된다는 신념이 굳어져 조선인으로서 좌시할 수 없었다”며 상고 취지를 밝혔다. 능리 장터에서 시위 중 체포된 농민 김두성(당시 20세)은 “반만년의 조선 역사가 10여 년의 세월 일장기 아래 묻혀 있었는데 평화의 춘풍이 삼천리에 이르니 2000만 중 한 명으로서 어찌 감동하지 않았겠는가”라며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은 인도와 정의에서 우러나온 것인데 어째서 법으로 처벌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했다. 서당 교사 전종철(당시 21세)은 “전국 각지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실을 듣고 조선인으로서 당연히 외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했다”며 “이는 사람으로서 본분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아무런 죄책이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 목포에선 청년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4월 8일 오전 10시 영흥·정명학교 재학생 및 기독교인 150여 명이 남교동 시내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제에 강제 해산됐다. 그러자 당일 오후 2시경 죽동 부근에서 기독교인 부인 4명이 또다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앞장선 것. 이날 하루만 일제가 검거한 목포 시민이 80여 명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이튿날에도 애국지사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 시위를 이어 나갔다.
독립기념관은 ‘황해도 능리시장 만세운동’ 판결문에서 피고 14명 중 아직 포상받지 못한 7명을 밝혀내 2021∼2022년 정부 포상을 이끌어냈다. 김은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발굴TF팀장은 “서울에 사는 지식인이 아닌 일반 민중들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충분히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시위에 참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3·1만세운동은 민중들이 부화뇌동한 우발적인 시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