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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明 공론정치를 서양과 접목한 日, 1890년 의회 개설[박훈 한국인이 본 일본사]

입력 | 2024-02-29 23:33:00

일본 제국의회 상원이었던 ‘귀족원’ 그림. 일본의 정치체계는 무사 중심이었기에 전통적으로 언론 기능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부 말 하급 사무라이와 상층 평민 중심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고 발언하는 이가 늘었고, 메이지 유신 후 정부 내 언론기관인 집의원 설치와 1890년 의회 개설로 이어진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바야흐로 총선의 계절이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총선은 그 유명한 2·12총선이다(1985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연합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전두환 정권에 일격을 가한 선거로 투표율 84.6%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영삼의 대리인으로 출마한 이민우 후보가 사자후를 토하던 유세장에서 정치의 후끈함을 느꼈다. 선거 결과 창당한 지 보름도 안 된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특히 서울 득표율은 43.9%(민정당 27.3%)로 중선거구제가 아니라 소선거구제였다면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것이다.》











명나라 순안어사, 지역 여론 전달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당시가 어떤 때였던가. 전두환 철권통치의 한복판으로 김영삼은 정치규제에 걸려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고, 김대중은 미국 망명에서 막 귀국한 때였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그들에게는 오로지 민심과 여론만이 우군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강권 통치도 결국 민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참 대단한 전통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서양의 민주주의가 알려지기 전인 전통 시대에도 민심과 여론을 중시해 왔었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도찰원(都察院) 등 언론기관이 잘 갖춰져 있었는데, 특히 15세기 중반 각 성에 파견된 순안어사(巡按御史) 제도는 주목할 만하다(이하 차혜원 논문 “중국근세관료제와 ‘언론’”·43회 동양사학회 동계연토회 기조발표문). 순안어사는 현지 상황과 지역 여론을 조정에 전달하는 등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신경망 역할을 했는데, 이에 따라 지방관에 대한 인물 비평 같은 지역 여론이 중앙에 전달되었다. 여론의 진원지는 학교였다. 악덕 관료가 있으면 학교를 중심으로 생원(生員)들이 대자보를 붙이고 여기에 일반 서민이 가담하여 실력행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명나라의 언론기관은 감찰과 언론의 양 기능을 함께 하는 성격의 것이었는데, 이는 언관(言官)으로 관료에 대한 감찰, 탄핵을 행한 조선의 대간(臺諫)으로 계승되며, 아래서 보는 것처럼 감찰 기능을 주로 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메쓰케(目付)를 막말기(幕末期·1853∼1868)에 언론기관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의 배경이 되었다.

이런 흐름의 정점은 명나라 말기 동림당(東林黨)과 복사(復社)운동이었다. 고헌성(顧憲成)을 중심으로 동림서원에 집결한 사대부들이 공론을 배경으로 황제 권력을 독점한 환관 세력 엄당(閹黨)과 맞섰다. 하지만 명의 공론 정치는 이민족인 청 지배하에서 종말을 고했다. 청은 순안어사제를 전격적으로 폐지했고, 중앙의 언관 조직은 지방 정보원으로부터 차단되었다. 이제 정보는 비밀리에 수집되었고 황제와 군기처만이 그 정보를 독점했다.



조선 서원·향교, 공론 형성 중심지

1696∼1870년 사헌부, 사간원에서 올린 소를 발췌해 편찬한 ‘간의등록’. 사간원과 사헌부는 왕에게 충고, 비판을 전달하고 관리의 부정부패를 감시해 고발하던 일종의 언론기관이었다.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정점에서 무너진 명나라의 공론 정치가 실현된 곳은 조선왕조였다. 특히 17, 18세기 조선은 훗날 ‘당쟁’으로 저명해진 여론 정치의 무대였다. 정부 내에는 삼사(三司·홍문관, 사간원, 사헌부)라는 언관이 국왕과 정부를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 언관의 활동은 세계사적으로도 특필해야 할 정도로 활발하고 강력했다. 정부 바깥에서는 사림(士林)들이 서원, 향교라는 공간, 향회(鄕會)라는 조직, 상서와 서한이라는 매체를 통해 중앙정치에 발언했다(박훈 논문 ‘근대일본의 공론정치와 민주주의’). 예를 들어 17세기에 전국적으로 벌어진 예송논쟁에서는 수만 통의 상서가 정부에 제출되었고, 연명 상서에 등장하는 이름도 18, 19세기에는 1만 명을 넘어섰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는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이 시기 공론 정치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공론 형성의 중심은 조선에서도 학교였다. 양반들은 18세기에 전국적으로 900개교를 헤아린 서원을 거점으로 삼았고, 19세기에 활발해진 평민들의 향중공론(鄕中公論)은 향교나 향회가 기반이었다. 전국의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드는 과거 시험장은 공론 형성의 중요한 무대였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 1774년 평안도 무과시험에 4만여 명이 응시했고, 1794년 응시 자격시험인 3일제(三日製)에 2만3900명이 응시하더니, 19세기 후반 과거 시험장에는 무려 20여만 명이 쇄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오수창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日 막부末 공론정치, 의회제도로


당시 공론의 장을 이끌었던 사무라이들. 왼쪽이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동아시아 공론 정치를 새롭게 발전시켜 서양 의회제도와 접맥한 것은 19세기 후반 일본이었다. 원래 도쿠가와 정치체제는 공론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도쿠가와 막부는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 가신단을 해체하지 않고 방대한 군사 조직을 유지했다. 평화가 이어지자 이것이 그대로 관료제가 되었으나 원래 군사 조직이었으므로 언관 같은 언론 기능은 취약했다. 메쓰케(目付)라는 기관이 있었지만, 이는 상부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다른 정부 조직을 감사하는 것이 주 임무였지, 쇼군(혹은 다이묘)의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막말기다. 광범한 하급 사무라이들과 상층 평민들이 정치에 대해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당시 공의여론(公議輿論), 처사횡의(處士橫議)라 불리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때 개혁가들은 중국의 예를 들면서 메쓰케를 언관 조직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런 움직임은 메이지유신 후 정부 내에 집의원(集議院) 같은 언론기관 설치로 이어지고, 이윽고 1890년 의회 개설을 이뤄냈다.

주말에 광화문을 걷는데 예외 없이 시위대가 귀를 찌르는 확성기로 열을 내고 있었다. 정말 고막이 터질 것 같아 귀를 막고 종로2가 쪽으로 피신했는데, 거기에도 반대쪽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져라 격한 말을 쏟아내던 사회자가 갑자기 말한다. “여러분∼ 제가 노래 한 곡 할까요?” 어느 연구자가 한국 시위는 조선시대 장터 문화 영향이 크다고 한 적이 있다. 고종 죽음과 3·1운동의 관계처럼 장례가 시위에 깊숙이 간여하는 전통도 조선시대 이래 유구하다. 또 작금의 한국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당쟁’이라는 익숙한 얼굴이 겹쳐 보인다. 외래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개념을 갖고, 한국 정치의 현상을 분석하는 글을 보고 싶다. 다음 총선 때는 가능하려나.

이제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따뜻한 봄과 함께 거리도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한국인들은 정치라면 욕부터 해대며 혐오하는 척하지만, 열 내며 욕한다는 것 자체가 관심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한국 정치의 ‘정체’를 모른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