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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현재, 미래가 인연으로 한자리에… 옛 경험 그려냈죠”

입력 | 2024-03-01 01:40:00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감독 내한 인터뷰
24년만에 만난 남녀 이야기 통해
서양에 없는 ‘인연’ 애틋하게 녹여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첫 장편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각본상 후보에 오른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은 “한국에서 12년을 살았기 때문에 (영화 소재인) ‘인연’이란 단어를 잘 알고 있다. 그 단어 덕에 내 인생이 깊어졌다”고 했다. CJ ENM 제공


11일(현지 시간) 열리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는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다. 36세의 젊은 여성, 미국 영화업계에서 비주류인 한국계 동양인 감독이 서울과 뉴욕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 후보에 선정된 영예를 안은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다. 송 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런, 스티븐 스필버그 등 기라성 같은 거장 감독들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놓고 경쟁한다.

2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처음 한국 언론들과 만난 송 감독은 사진보다 앳돼 보였다. 화장기 없는 처진 눈매에 짧게 커트된 머리는 손질을 했는데도 삐죽빼죽했다. 공식 석상에서 흰 셔츠에 검은 재킷을 고수하는 그답게 이날도 딱 부러지는 정장 차림이었지만 자주 밝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모든 질문에 유창한 한국어로 답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24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시절 친구 해성(유태오·왼쪽)과 나영(그레타 리·가운데), 나영의 남편 아서(존 매가로)가 뉴욕의 한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CJ ENM 제공

6일 개봉하는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 이어질 듯, 이어지지 못한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의 이야기다. ‘인연’과 ‘전생’이라는 키워드로 엇갈린 두 사람의 삶을 그렸다. 두 사람은 열두 살에 만나 좋은 친구가 되지만 나영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헤어진다. 24년이 흐른 뒤 해성이 뉴욕에 나영을 찾아 오지만 나영 곁에는 이미 남편 아서(존 매가로)가 있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이틀을 함께 보내며 인연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영화는 송 감독의 실제 경험에서 시작됐다. “어느 날 밤 한국에서 놀러 온 제 어린 시절 친구와 뉴욕에 사는 미국인인 제 남편 사이에서 통역을 하며 대화한 적이 있어요. ‘지금 내가 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송 감독은 영화 ‘넘버3’(1997년)를 만든 송능한 감독의 딸이다. 그는 “아버지가 (영화의 성과에) 굉장히 기뻐했다”며 “(이 영화의) 조명 감독님은 학생 시절에 저희 아버지 강의를 들었다고 이야기해 줬다”고 했다.

절반 이상이 한국어 대사라는 점이 처음에는 걸림돌이 됐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년)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뒤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고 했다. 송 감독은 “기생충 이전에는 자막이 필요한 영화라는 걸 모두들 걱정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자막 영화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국제 영화계에서) 기생충이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말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최고 권위 시상식에서 줄줄이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고 있다. 제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 제77회 영국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등 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지난 20년간 본 영화 중 최고의 장편 데뷔작이다. 정교하고 섬세하며 강렬하다”고 평했다.

이 같은 호평은 서양인들에게는 새로운 ‘인연’이라는 개념을 영화 속에 애틋하고 아름답게 녹인 덕이다. 송 감독은 “인연이란 단어가 외국에는 없는 단어지만 그 느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영화를 통해 ‘인연’이란 단어를 배워서 한국어로 발음하는 관객들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낀다”고 했다. 극작가 출신인 송 감독의 배경답게 영화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한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지는 미지수다. 이민자 정서와 서툰 두 배우의 한국어가 오히려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송 감독은 또 영화 연출에 도전하겠다며 눈을 반짝였다. “지금 이 순간, 영화에 너무 푹 빠졌어요. 매일 저 자신을 새롭게 알게 되는 그 과정이 너무 재밌었거든요. 계속, 계속 하고 싶어요.”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