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종 경기 레전드 김건우가 하늘로 날아오르듯 달리는 모습. 한국신기록을 4차례나 세운 김건우는 ‘철인 중의 철인’으로 꼽힌다. 김건우 제공
육상 10종 경기(Decathlon)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종목이다. 빨리 뛰고, 멀리 뛰고, 높이 뛰고, 장애물도 넘어야 하면서 각종 도구도 잘 던져야 한다. 10종 경기는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데 첫날엔 100m 달리기, 멀리뛰기, 포환던지기, 높이뛰기, 400m 달리기를 한다. 이어 둘째 날 110m 허들, 원반던지기, 장대높이뛰기, 창던지기, 1500m 달리기를 한 뒤 각 종목 점수를 합친 총점으로 순위를 가린다.
어지간히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도 10종 경기에 포함되는 모든 종목을 제대로 열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서까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더욱 찾기 힘들다.
김건우의 인생을 바꿔준 장대높이뛰기. 사진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의 모습. 동아일보 DB
김건우가 10종 경기 선수가 된 건 역설적이게도 잘하는 종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육상을 시작한 김건우는 고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자신의 특기를 찾지 못했다. 단거리 달리기가 안 되니 허들로 전향했다가, 그것도 안 되니 멀리뛰기를 했다가, 그마저 안되니 세단뛰기를 했다. 하지만 모두 변변치 않았다. 전국체전 출전은커녕 도 대회 입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들려온 코치의 한 마디. “넌 잘하는 건 없고 조금씩 흉내는 낼 줄 아니 10종경기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딱 2주 훈련한 뒤 추계 중고대회에 출전했다. 종목 순서도 헷갈리는 지경이었으니 규칙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런 그에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적은 둘째 날 장대높이뛰기에서 일어났다. 이전까지 2.70m가 최고 기록이던 그는 3.20m를 신청했다. 뒤늦게 현장에 온 코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연한 듯 1, 2차는 모두 실패였다. 그리고 마지막 시도. 바를 넘긴 했다. 그런데 올라갈 때 종아리로 바를 건드렸고, 내려올 때 손으로 또 한 번 건드렸다. 이젠 모든 게 끝이구나 하고 포기한 순간 주변에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위를 쳐다보니 바가 부르르 떨면서 춤을 추고 있더란다. 성공 판정을 받은 그는 남은 세 번의 기회에서 3m80까지 성공시켰다. 마지막 종목을 마친 후 점수 계산 후 1등으로 그의 이름이 호명됐다. 당시 학생 신기록이자 자신의 인생 첫 금메달이었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한국신기록 7860점을 작성한 김건우가 태극기를 펴 들고 트랙을 돌고 있다. 동아일보 DB
한순간에 유망주가 된 그는 특기생으로 한국체대에 입학했다. 3학년 때부터는 성인 무대를 평정했다. 그해부터 2007년까지 전국체전 8연패에 성공했고, 2006년 도하 아시아게임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까지 따냈다. 선수 시절 그는 한국 신기록도 4차례나 경신했다. 그가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한국신기록 7860점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첫 출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게 인생역전의 계기가 됐다. 당시 축하도 받았지만 ‘너처럼 운 좋은 놈은 처음 본다’는 말도 들었다”며 “부끄럽지 않은 선수가 되기 위해 정말 이를 악물고 운동했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니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2017년을 끝으로 30년 가까운 육상 선수 생활을 마감한 김건우는 요즘 자신의 11번째 종목을 뛰고 있다. 그는 KBS 육상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1년 도쿄 올림픽과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때 마이크를 잡았다. 10개 종목을 통달하고 있는 ‘팔방미인’인 만큼 어떤 육상 종목을 맡아도 거뜬히 해냈다.
KBS 육상 해설위원으로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찾은 김건우의 모습. 김건우 제공
그는 또 서울 동작구에서 ‘그라운드 K’라는 이름의 육상 전문 퍼스널 트레이닝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라운드는 기초 또는 바닥의 의미로 육상 트레이닝이 모든 운동의 기본이라는 뜻을 담았다. K는 자신의 성을 땄다.
수강생의 절반 이상은 엘리트 선수를 꿈꾸는 육상 유망주들이다. 경찰특공대 지원자들과 공무원 체력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일반인 중에는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익히려는 사람들과 부상을 입은 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요즘 많은 분들이 골프와 테니스 등을 즐긴다. 그런데 모든 운동은 기본적인 몸이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유산소와 코어 운동 등 기본 트레이닝을 꾸준히 병행해야 다치지 않고 오랫동안 운동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20년 가까이 국가대표 생활을 하며 운동에만 전념했던 그가 하는 첫 사업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했던 최근 몇 년간은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20년 가까이 했던 10종 선수 생활은 항상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건 바로 인내였다”며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센터를 열었고, 지금도 10종 경기를 했던 것처럼 내 방식대로 어려움을 풀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건우는 은퇴 후 기본을 중시하는 의미를 담은 피지컬 트레이닝 센터인 ‘그라운드 K’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10종목 중 힘들지 않은 종목은 하나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첫 날 400m 달리기와 둘째 날 마지막 종목인 1500m는 남은 힘을 다 쏟아부어야 했기에 가장 힘들었다.
그의 고된 몸을 달래준 건 단 음식이었다. 그는 식사 후엔 항상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다. 그런데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미국 전지훈련 중 미국인 코치로부터 “경기력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안 먹어 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들었다.
그는 “항상 알고 있었지만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하나 포기해야 뭔가 새로운 걸 얻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놀고 싶은 거 다 놀면서 잘하기를 바랄 순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날로 아이스크림과 탄산음료를 끊기로 했다. 하루하루 달력에 체크를 했다. 단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날은 승리, 그렇지 않은 날은 패배로 표시했다. 한두 달이 지나자 승리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결국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탄산음료는 전혀 마시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은 아주 가끔 먹는다.
김건우가 선수 시절 받았던 메달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김건우는 일반인들에게도 운동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소하고 작은 습관들이 모여야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 운동을 시작하는 회원들에게 “일단 매일 팔굽혀 펴기 3개씩만 하라”고 주문한다. 30개가 아니라 3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 운동할 때 목표를 너무 높이 잡는다. 그걸 하루 이틀 거르다 보면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며 “하루에 팔굽혀 펴기 3개를 하되 이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습관이 되어야 한다. 이게 쌓이다 보면 자신의 몸에 맞게 개수를 10개, 20개로 늘리면 된다”고 했다.
이때도 달력에 승패표를 만들면 더욱 효과적이다. 하루 팔굽혀 펴기 3개를 한 날은 승리, 그렇지 않은 날은 패배로 표시한다. 팔굽혀 펴기도 좋고, 계단 오르기도 좋고, 스쾃도 좋다. 그렇게 승리가 늘어나고 달력이 모두 승리로 표시되는 날이 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는 “한번 습관이 들면 아무리 피곤해도, 술을 마신 날에도 가볍게나마 운동을 한다. 반대로 잘못된 습관도 쉽게 든다. 많은 분들이 야식을 먹는데 배가 정말 고파서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먹는다. 그래서 습관이 정말 중요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도 절제된 생활과 꾸준한 운동으로 자기관리를 한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상체와 하체, 복근, 배근 등 4가지로 나눠서 한다. 몸의 기초가 되는 큰 근육들이다. 굳이 피트니스센터에 가지 않아도 상체는 팔굽혀 펴기, 하체는 스쾃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 복근은 윗몸 일으키기와 레그 레이즈, 배근은 엎드린 상태로 상체를 일으키는 식으로 강화할 수 있다.
주중에 이 같은 운동을 빠뜨리지 않고 하는 그는 주말에는 동호인 야구와 축구를 즐긴다. 그는 “10종 경기를 할 때는 모든 게 혼자서 하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야구와 축구는 다 같이 하는 종목이라서 너무 재미있다”며 웃었다.
김건우는 요즘도 절제된 생활을 하며 자기관리에 열심이다. 김건우 제공
그는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도 강조했다. 그의 선수 생활의 하이라이트가 됐던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은메달 역시 포기하지 않았기에 따낼 수 있었다.
대회 전까지 그는 족저건막염으로 크게 고생했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오른쪽 햄스트링에도 부상을 안고 있었다.
첫날 5종목을 마쳤을 때 그는 12명의 출전 선수 중 거의 꼴찌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기에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런데 둘째 날 5종목을 뛰면서 무려 6명의 선수가 완주를 하지 못하고 중도탈락했다. 그는 메달을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 1500m까지 최선을 다해서 뛰었을 뿐이다. 그런데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은메달이었다. 그는 “10종 경기를 하면서 항상 나 자신과 싸웠지만 광저우 대회는 나 스스로를 이겨낸 대회였다. 누구든 포기하지 않으면 기적 같은 순간은 반드시 온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