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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작품이 되는 순간[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4-03-03 23:24:00

<80> 미술관과 관객




미국 사진가 프리츠 헨레가 찍은 뉴욕 현대미술관 청소부 사진. 청소부의 시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어느 특정 예술품도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진 출처 소셜미디어 ‘핀터레스트’

관객은 실로 다양하다. 미술 전문가들부터 시작해서 관람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까지. 선생님을 따라 단체 관람 온 학생들은 물론이고, 모작(模作)을 그리기 위해 온 화가도 있고,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온 연인들도 있다. 유럽의 미술관에는 은퇴한 노인들이 많이 오는 반면, 한국의 미술관에는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이 많다. 인기 절정의 작가 전시 오프닝에는 한껏 자신의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이들이 운집할 때도 있다. 이쯤 되면 미술관 볼거리는 작품만이 아니다. 작품을 보러 온 관객들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유명한 미술관을 방문하려 할 때면 뭔가 역설적인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나 자신이 관객이면서도, 내가 가는 시간에 나 같은 관객이 적기를 바라는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보러 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모나리자 그림 앞은 언제나 아수라장이 아니던가. 세계적인 명화를 가까이서 보려는 사람들과 명화 옆에서 사진 찍으려 드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새통을 이룬다. 호젓하고 느긋하게 감상하기 가장 어려운 그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이탈리아 여행’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고대 조각을 호젓하게 대면하며 형언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장면 같은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관객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 한밤의 미술관 작품을 집중적으로 찍어 온 사진가 페르난도 마키에이라는 아마도 북새통의 미술관에 질려 버린 사람이 아닐까. 그의 목표는 관객의 유무에 따라 예술품 자체가 달라진다는 비밀을 포착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실로 고적한 어둠 속에서 작품들은 관객이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존재감을 드러낸다. 혹은 그렇게 드러나도록 마키에이라는 사진을 찍는다. 마키에이라의 사진대로라면, 우리는 사실 한 번도 예술품의 진면모를 본 적 없는지도 모른다. 관객이 모여드는 순간 예술품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거니까.

우리도 마키에이라처럼 호젓하게 유명 작품을 대면하고 싶다. 오랫동안 작품과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엄청난 권력자나 미술관에 거액의 기부를 한 재력가라면, 좀 더 호젓한 환경에서 관람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전시 작품 설치 중에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 없이도 누구보다도 호젓한 환경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미술관 청소부다.

청소부는 관람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인물이면서 전시의 스포트라이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전시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작가, 큐레이터, 관장, 학예실장, 후원자 등 전시 성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획과 작품과 성원 없이는 전시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러나 전시 기간 내내 청소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전시는 불가능하다.

청소부에게도 어느 순간 전시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 그치고 그 자신 관객이 될 기회가 온다. 이를테면 미술관 전시 시간이 끝나 모든 관객이 집으로 돌아간 시간을 떠올려 보라. 이제 청소부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해야 한다. 어쩌면 바로 그때야말로 예술작품을 관람하기 최적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인파에 휩쓸리지 않아도 되고, 성가신 관람 규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호젓한 환경에서 작품을 응시하는 거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사진가 알렉산더 아르테미예프가 찍었다고 알려진 1962년 베니스 비엔날레 사진. 한 청소부가 전시장에 놓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청소부가 관객의 위치에 온 순간을 포착했다. 사진 출처 소셜미디어 ‘X’

러시아 출신의 미국 사진가 알렉산더 아르테미예프(1903∼1963)가 찍었다고 알려진 1962년 베니스 비엔날레 사진을 보자. 한 청소부가 전시장에 놓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원래 관객이 아니라 관객의 편의를 위해 복무하는 청소부가 관객의 위치에 온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이 우연히 포착한 사진인지, 아니면 연출된 사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사진에서 청소부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며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일까. 자코메티가 원한 것처럼 실존적 인간 조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조각의 인간 군상들은 너무 삐쩍 말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사진보다는 독일 태생의 미국 사진가 프리츠 헨레가 찍은 뉴욕 현대미술관 청소부 사진을 더 좋아한다. 얼핏 보면, 청소부가 청소 와중에 청소를 멈추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사진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소부의 시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어느 특정 예술품도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알 도리는 없다. 다만, 우리는 청소부가 어둠 속에 빛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만 확인할 수 있다. 청소의 와중에 어둠 속에 서서 밝은 쪽을 고요히 응시하는 모습, 거기에 깃든 모호함과 위엄. 이제 이 청소부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처럼 보인다. 그렇다. 헨레는 관객으로서 청소부를 찍은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청소부를 찍은 것이다.

1년여 전 이 헨레의 작품 오리지널 프린트를 사서 거실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가끔 생각에 잠긴다. 그 사진을 보다 보면 일상에 깃든 예술성을 느끼기도 하고, 새삼 뉴욕의 미술관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오늘만큼은 어지러운 거실을 청소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기도 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