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회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스터리 영화다. 각본을 쓰고 연출한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열두 살 때 서로 좋아하던 남녀가 24년 만에 뉴욕에서 만나서 데이트하는 이야기인데도?
송 감독은 “첫 장면에서 주인공 세 사람이 등장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데, 대답 자체가 미스터리”라고 설명한다. 영화는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 나영의 남편 아서(존 매가로)가 새벽 4시 한 술집에서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는 접근. 맞다. 이건 틀림없이 미스터리다. 여기선 저마다의 정체성과 여기서 파생되는 관계가 가장 중요한 테마다.
영화든 실제든 한 인간의 정체성이란 다양한 성분 배합이다.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것,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은 것. 각각의 요소가 얼마나 비율별로 뒤섞이고 혼합되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그 배합의 비율이란, 돌이켜보면 늘 공교롭고도 묘한 것이다.
여기서 나영은 중산층 배경에 열두 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나영은 해외에서 쓸 이름을 선택해야 할 때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노라라는 이름을 부모에게서 받다시피 한다. 이는 모두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영 혹은 노라는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온 작가로서의 삶을 위해 캐나다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예술인 레지던시에 입주한다. 선택이다. 선택과 조건이 중첩되며 삶이 구성된다.
그러나 나영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인연이라는 의미를 남겨둔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때에도, 몇 겹의 인연이 쌓여서 만들어진 필연이라는 믿음. 이건 돌고 돌아 선택과 우연이 쌓여 만들어진 자기 정체성을 긍정하는 논리가 된다. 우연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으며 실패와 착오, 삶의 교차와 엇갈림에 대해서도 납득한다. 여기 나 자신은 불가피하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명제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아마도 나영은 오프닝 장면에서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가능했던 삶의 형태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로맨스조차도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받아들일 테니. 오히려 로맨스 대신 나라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빠져들어 가며 속에서 계속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한 질문은 이민자의 테마만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인연 속에 흘러간다. 정체성이란 늘 유동적이다. 이러니 타인을 한 가지 정체성으로 함부로 규정해도 될 것인가.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