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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곳곳 反이스라엘 문구… 일부선 “하마스 지원 그만”

입력 | 2024-03-04 03:00:00

집권 강경보수파 ‘반미-반이’ 주력
시민들 “경제 힘든데 타국 전쟁 지원”
젊은층은 “이스라엘과 화해” 주문도



미국 성조기를 타고 흐르는 이란산 미사일 그림에 ‘미국과 함께 추락’이란 영어 문구가 적힌 이란 수도 테헤란의 한 건물 외벽. 테헤란=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이란은 미국과 절대 가까워지지 않는다.”

1일 이란 수도 테헤란 도심의 건물 외벽 아래에 페르시아어로 적힌 문구다. 이 벽에는 미국 성조기 위로 낙하하는 미사일 포탄과 해골 그림이 있었다. 영어로 ‘미국과 함께 추락(Down with U.S.A.)’이란 글도 보였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친미 성향의 왕정을 몰아내고 집권한 강경 보수 세력은 집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줄곧 미국을 악마화했다. 2002년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이 불거진 후 서방의 경제 제재도 계속됐다. 이 와중에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당시 이란과 서방 5개국이 맺은 핵합의를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란산 석유 등에 강도 높은 제재를 부과하며 경제난이 가중됐다. 이로 인해 이란 국민의 반미 여론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런 기류가 현재도 유지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테헤란 곳곳에는 이란과 직접 교전을 벌이다가 숨진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 대원을 기리는 추도 장소도 있었다. 테헤란=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테헤란 곳곳에서는 미국은 물론 미국의 중동 최우방국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포스터 등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슬람 사원(모스크), 교차로, 박물관, 공원 등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는 사실상 이란을 대신해 이스라엘과 직접 교전을 벌이고 있는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공간도 어김없이 마련돼 있었다.

한 모스크 인근에서 만난 시민 모하메드 씨는 “이스라엘은 이란의 주적(主敵)이다. 이런 이스라엘과 싸우다 죽은 헤즈볼라 대원은 순교자”라며 “순교자를 추모하러 왔다”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정부가 헤즈볼라,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을 공격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예멘의 시아파 반군 후티 등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국내 경제난이 심한데 왜 밖에다 돈을 퍼주냐는 의미다. 또 다른 시민 다니엘 씨(52)는 “이스라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란인은 평화를 사랑한다. 국민이 먹고살기 힘든데 다른 나라의 전쟁만 지원하는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과 무역업을 한다는 카데르 씨(49)는 기자가 한국인임을 확인한 후 “제재로 삼성, LG의 좋은 전자제품을 직접 들여올 수 없다. 설사 몰래 들여와도 암시장에서 엄청나게 비싸게 팔린다”며 “정부의 강경 외교 때문에 국민이 불필요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2022년 9월 ‘히잡 의문사’ 등으로 정부에 반감을 가진 일부 젊은 층은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주문하기도 했다. 테헤란 외곽 타지리시 전통시장에서 만난 대학생은 익명을 요구하며 “이란 국민의 적은 우리 정부다. 그런데 적(정부)의 적(이스라엘)은 사실 친구 아닌가. 그래서 이란 국민과 이스라엘 국민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슬람혁명 전에는 이란에도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 당시에는 우리 모두가 친구였다”고 강조했다.


테헤란=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