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1만2천 심장 뛰게한 퇴직의사 “후배와 환자 곁에 계속 있겠다”

입력 | 2024-03-04 11:27:00

6·25 참전용사 선친 뜻 이어
퇴임 후에도 광주보훈병원서 진료
“심장질환 연구 계속 이어가며
후배 노벨의학상 길 열어주겠다”




‘세계 최다 돼지 심장 실험, 심근경색증 분야 세계 최다 논문 발표. 심장 스텐트 업계 미다스의 손…’

지난달 29일 전남대병원을 정년퇴임한 정명호 순환기내과 명예교수(65)에게는 ‘심혈관 명의’라는 애칭이 붙어 있다. 정 명예교수는 막힌 혈관에 스텐트를 넣어 확장하고 약물 치료를 통해 다시 혈관이 좁아지지 않게 하는 심근경색증 시술(관상동맥중재술)로 정평이 나 있다. 퇴임 전까지 하루 외래환자가 250여 명, 그동안 진료한 환자만 1만2000여 명에 달한다. 시술도 매년 3000~4000여 건을 진행했다.

그는 시술에 필요한 스텐트 개발을 위해 국내 최초로 동물 실험을 시작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1996년 미국 연수에서 돌아와 인간의 심장과 가장 비슷한 돼지를 이용해 지금까지 3722마리로 실험해 ‘돼지 아빠’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순환기내과 관련해 1920편의 논문과 96권의 저서를 발표해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 업적을 남겼다. 특히 급성심근경색증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논문(425편)을 발표한 연구자로 이름을 올렸다.

37년 동안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봐 온 그는 4일부터 광주보훈병원 순환기내과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의료 발전과 환자 생명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 명예교수와의 일문일답.

정명호 전남대 의과대학 명예교수가 4일부터 광주보훈병원 순환기내과에서 진료를 시작하며 진료실 앞에 서 있는 모습 . 정 명예교수 제공

―광주보훈병원에서 진료를 새로 시작한 소감은.
“첫날부터 환자들이 몰려 정신없이 보냈다. 병원 측에서 진료실 외에 연구실을 따로 마련해줬다. 연구실 분위기는 전에 근무했던 대학병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동안 모아온 돼지 인형으로 장식장을 가득 채웠다. 돼지는 인간과 장기가 가장 비슷한 동물이다. 돼지 덕분에 연구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실제 시술에서 높은 성공률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니 돼지 인형은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

―광주보훈병원을 택한 이유는.
“선친이 6·25전쟁 참전용사다. 퇴임 후에 여생을 보훈병원에서 봉사하고 싶었다. 보훈대상자는 물론이고 심장병 환자,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증, 동맥경화증, 심부전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다. 그동안 유치에 공을 들였던 국립심뇌혈관연구소가 가까이 있는 것도 보훈병원을 택한 이유 중 하나다. 국립심뇌혈관연구소 설립 부지와는 차로 5분 정도 걸린다.”

―보훈병원에서도 연구를 이어가나.
“한국인 급성심근경색증 등록 연구 총괄책임자로서 그동안 심근경색증 환자를 위한 새로운 진단법 및 치료법을 연구했다. 이곳에서도 새로운 심혈관계 약제를 이용한 임상 연구와 심장혈관 스텐트를 개발할 예정이다. 심장 재활 환자를 위한 심부전증 치료제 개발과 관련한 기초 및 임상 연구도 진행한다. 심장 재활은 기존의 운동 및 식이요법뿐 아니라 심리 요법을 병행하는 포괄적 치료다. 병원에 오지 않고 집에서 재활치료가 가능토록 돕겠다.”

―국립심뇌혈관연구소 설립은 어떻게 돼 가나.
“2007년부터 추진했던 국립심뇌혈관연구소 설립 예산이 지난해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해 올해 착공 예정이다. 국립심뇌혈관연구소의 기능과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려면 최소 570명의 연구원이 필요하다. 한 명의 연구원을 키워내는 데 평균 10년의 세월과 비용이 필요한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착공 후에는 연구소 활성화를 위해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교육과 유통 인프라 등이 구축돼 관련 인력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정년퇴임을 하면서 후학들에게 특별히 당부한 말이 있나.
“환자를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성실하게 치료하라고 당부했다. 기초의학 연구를 통해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데 매진하라고 했다. 심장병 환자를 치료하는 새로운 약이나 스텐트는 대부분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연구 개발해 언젠가는 수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당부도 했다.”

지난달 28일 열린 정년퇴임식에서 제자들이 정명호 명예교수의 정년퇴임을 축하하고 있다. 정 명예교수 제공

―그동안 가장 보람 있는 일을 꼽는다면.
“세계 최다 돼지 심장실험을 통해 의학박사 학위 수여자를 23명을 배출했는데 이중에서 16명이 의대 교수가 됐다. 스텐트 국산화를 위해 힘을 쏟았다. 혈전이 안 생기고 심근경색이 재발하지 않는 스텐트를 개발하는데 성공해 미국 특허까지 등록했다. 2006년 지역 의과대학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 된 것도 개인적으로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인생 목표가 국립심뇌혈관연구소 설립과 노벨과학상을 배출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는 이뤄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국내 첫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데 진력하겠다. 퇴임했지만 주말에 전남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실로 나가 제자들과 임상 연구를 하고 특허도 계속 개발할 예정이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