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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하정민]유럽은 없다

입력 | 2024-03-05 23:39:00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혁신 역량 부족 등으로 유럽 경제의 부진이 심화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의 발전으로 강한 성장세를 유지하는 미국 경제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동아일보DB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단일 패권국으로 거듭났다. 유럽 전체가 폐허로 변했지만 미 본토의 피해는 전무했기에 막강한 제조업 인프라를 쉽게 구축할 수 있었다. 달러 또한 기축통화가 됐다. 최근 중국의 부상 등으로 과거보다 정치사회적 패권은 약화됐지만 경제 패권은 굳건하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2년을 넘겼다.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나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의 경제 격차가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질지 모른다.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자본시장 규모, 주요 기업의 시장 가치 등은 이미 비교가 무의미한 수준이다.

지난해 미 경제는 연율 2.5% 성장했다. 특히 4분기(10∼12월) 성장률은 3.2%에 달했다. 미 기준금리는 5.5%로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높다. 미국보다 기준금리가 1.0%포인트 낮은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지난해 성장률은 0.5%로 추정된다. 역내 최대 경제대국 독일 경제는 같은 기간 ―0.3% 성장해 ‘유럽의 병자’로 불린다.

미국과 유로존의 지난해 GDP가 각각 약 27조 달러, 약 15조 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2.5%’와 ‘0.5%’란 성장률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미국의 덩치가 훨씬 크고 성장을 방해하는 고금리 환경이 펼쳐졌는데도 몸집을 불리는 속도가 빠르다.

또한 미 1위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의 시가총액은 3조 달러가 넘는다. 유럽 1위인 덴마크 노보노디스크는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5710억 달러. 미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나스닥 시장에 상장된 기업들의 시총 합계 또한 약 49조2000억 달러다. 유로넥스트(약 6조8000억 달러)의 7배 이상이다.

유럽 땅에서 벌어진 2년간의 전쟁은 유럽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고 경제 부담도 급증시켰다. 에너지 자립이 가능한 미국과 달리 러시아산 의존도가 높은 유럽 경제의 한계도 노출했다.

특히 겉으로는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기치로 러시아의 폭주를 막겠다면서도 뒤로는 자국의 이해관계만 중시하는 민낯도 드러냈다.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허울뿐인 대(對)러시아 제재 대신 촘촘한 제재를 가하는 데 주저한다. 무기가 부족한 우크라이나를 위해 한국 등 제3국의 무기를 수입하자는 주장 또한 역내 군사 강국 프랑스가 반대한다.

전쟁 전부터 누적된 문제도 있다. 미국은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에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고급 해외 인력을 빨아들여 높은 혁신 역량을 보유했다. 유럽은 급격한 고령화 와중에 중동, 북아프리카 등의 저숙련 이민자가 주로 유입돼 생산성 향상이 더디다. 미국에 비해 짧은 근무 시간, 강성 노조 등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덜 일하고 더 노는데 앞서 있는 경쟁자를 따라잡을 순 없다.

또한 구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 등 미 빅테크가 이미 유럽 정보기술(IT) 시장을 장악했는데도 유럽은 빅테크 규제에만 골몰한다. 규제보다 시급한 것은 유럽판 구글, 애플을 만들고 키우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철퇴를 가한들 이미 유럽 전체가 미국의 IT 식민지나 다름없는 판국에 유럽 기업이 그 자리를 메꿀 능력은 있는지 의심스럽다.

2000년 6월 당시 부동의 세계 1위 휴대폰 기업이었던 핀란드 노키아의 시총은 약 3000억 유로였다. 당시 애플(200억 유로)보다 15배 많았다. 채 24년이 못 되는 기간에 애플은 시총 약 3조 달러의 공룡이 됐지만 스마트폰의 도래를 예측하지 못한 노키아의 휴대전화 사업부는 MS에 팔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강도 높은 혁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더 많은 유럽 기업이 비슷한 전철을 밟을 수 있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