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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형준]아베노믹스 12년이 부린 마법

입력 | 2024-03-05 23:45:00

수출 대기업에 혜택 집중돼 온갖 비판 받았지만
일관성 있게 추진되자 기업 실적 개선, 주가 상승



박형준 산업1부장


일본 닛케이평균주가 35년 치를 뽑아보면 거대한 ‘U’를 볼 수 있다. 주가는 거품 경제 최절정기였던 1989년 3만8915엔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급락했고, 그 이후 오랜 기간 횡보를 보였다가 지난달 22일 다시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 소식을 전한 니혼게이자이신문의 1면 제목이 재밌다. ‘이번엔 거품 후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는 거품이 잔뜩 끼었다. 금리가 낮으니 일본인들은 은행 돈을 빌려 부동산과 주식을 샀다. ‘사면 무조건 오른다’는 믿음이 가득했다. 이런 버블 속에 주가는 치솟을 수밖에 없다. 최근 주가 상승은 인공지능(AI) 기대감에 따른 반도체 관련 주들이 이끌었다. 기업의 탄탄한 실적을 보고 외국 투자자들도 밀려들었다. 거품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한번 닛케이평균주가를 보자. 상승 랠리는 2012년부터 시작됐다. 그 이후 부침은 있었지만 주가는 꾸준히 올랐다. 2012년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재취임한 때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대규모 금융 완화, 재정 지출 확대, 성장 전략 등 3가지를 핵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내놨다. 이를 통해 시중에 무한정 돈을 공급했다. 엔화가 넘쳐나니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니 일본의 수출품이 싸졌다. 수출 대기업이 아베노믹스의 혜택을 톡톡히 입으면서 그 기업들이 주가를 끌어올렸다.

놀랍게도 아베노믹스 발표 이후 10년이 더 지났지만 지금도 일본 경제 정책 근저에는 아베노믹스가 흐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파로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전 세계는 2022년 전후부터 기준금리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은 2016년부터 실시한 마이너스 기준금리(―0.1%)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엔화 약세도 여전하다.

아베노믹스에 대한 비판도 많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 문제는 아킬레스건이었다. 하지만 일본종합연구소가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 ‘기업 규모별로 본 임금 동향의 특징’을 보면, 2012년부터 10년 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정규직 임금 격차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2012년 대기업 임금은 중소기업보다 32.5% 높았지만 2022년에는 22.6% 높은 수준에 그쳤다. 연구소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대기업에 많이 유입됐고, 대기업 취업 빙하기(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입사한 이들이 간부가 되면서 고임금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 등을 원인으로 분석했다. 아베노믹스 혜택이 대기업에 집중됐지만 아이러니하게 다른 경제적 이유로 양극화는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대기업만 살찌운다”는 비판이 무서워 일찌감치 정책을 포기했다면 일본 주가의 신기록 달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10년 이상 지속되는 경제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여러 이유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대기업에 혜택이 집중된다는 분석이 나오면 정책 입안자는 그 정책을 힘 있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또 5년마다 새 정권이 들어서기에, 심지어 여당이 재집권을 해도 전임자의 정책은 대체로 부정되기에 특정 정책이 10년 이상 지속되기 힘들다. 설혹 정권을 초월해 경제 정책이 추진된다고 해도 기업들이 그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특정 정권에서 너무 잘나가면 다음 정권에서 구설에 오르고, 나아가 세무조사나 검찰 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정책 일관성이 일본에서 부린 마법을 한국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이유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