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사팀 현지조사 후 보고서 발표 “여성 시신 대부분 옷 벗겨진 상태… 이스라엘측도 팔 여성 상대 범죄” 하마스 피해자 돕는 이스라엘 변호사 “여성 인권, 각국 갈등과 별개 사안… 이-팔 포함 모든 여성 보호 받아야”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당시 붙잡은 민간인 인질을 상대로 각종 성폭력을 자행했다는 유엔 보고서가 4일 발표됐다. 하마스는 그간 관련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줄곧 부인했지만 성폭력 정황을 입증하는 유엔 차원의 보고서가 공개됨에 따라 상당한 후폭풍이 일고 있다.
하마스 피해자들에게 법적 조언을 제공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스라엘 인권 변호사 아옐레트 라진 베트 오르 씨(45·사진)는 5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가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은 성폭력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단지 이스라엘 여성 피해자만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팔레스타인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은 성폭력이라는 끔찍한 일을 겪어서는 안 된다”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 사회의 공조를 촉구했다. 검사 출신인 그는 지난해까지 이스라엘 여성지위향상위원회 위원장(차관급)을 지냈다. 이후 현지 시민단체에서 하마스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 유엔 “하마스, 지금도 성폭력 자행”
프러밀라 패튼 유엔 분쟁성폭력 특사가 이끄는 유엔 특사팀은 4일 하마스의 성폭력 실태에 관한 24쪽의 보고서를 발표하며 “하마스가 성폭행, 성고문 등을 자행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풍부하다”고 밝혔다. 하마스가 인질을 대거 붙잡은 가자지구 인근 노바 음악축제 현장, 레임 키부츠, 232번 도로 등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여성 시신이 옷이 벗겨진 상태였다고 공개했다.
이번 보고서는 특사팀이 올 1월 29일∼2월 14일 이스라엘 현지를 방문해 직접 작성했다. 특사팀은 50시간 분량의 현장 영상과 5000장 이상의 이미지를 분석했으며 당시 구조대원, 현장 목격자 등과도 만났다.
패튼 특사는 “당시 생존자와 풀려난 인질들이 전문적인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는 데다 사람들 앞에 나올 준비가 돼 있지 않아 성폭력 피해자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성폭력의 전반적인 규모와 범위, 구체적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고 공개했다.
특사팀은 하마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측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상대로 저지른 성폭력 실태도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인권단체 등으로부터 이스라엘군 역시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구금돼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나체로 신문하거나 생식기를 구타하는 등 성폭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진술을 확보해 이스라엘 정부에 문제 제기를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 “각국 여성계, 하마스 피해자 무관심”
오르 변호사는 이날 전 세계 주요 여성단체가 하마스의 성폭력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는 “전쟁을 이유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그간 여성계가 이뤄놓은 성폭력 방지에 관한 각종 성과를 저버리는 것”이라며 여성 인권은 각국의 외교 및 군사 갈등과 별개 사안이라고 밝혔다. 오르 변호사는 이스라엘 측의 성폭력 의혹에 대해서도 “사실이라면 이스라엘군 역시 처벌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이번 전쟁이 비록 하마스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했지만 이스라엘의 지속된 보복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망자가 3만 명을 넘어선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달 29일 이스라엘군이 구호품을 얻기 위해 몰려든 가자 주민에게 발포해 최소 118명이 숨지자 국제 사회의 반(反)이스라엘 여론이 고조됐다. 반면 이스라엘은 사망자 대다수가 압사했다며 조준 사격을 부인하고 있다.
오르 변호사는 “아직도 100명이 넘는 이스라엘 민간인이 하마스에 인질로 잡혀 있다”며 “하마스가 이들을 상대로 여전히 성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국도 도와 달라”고 강조했다. 다만 오르 변호사 역시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자 급증에 가슴 아프다며 가자 주민들이 겪는 고통에 “참담한 심정”이라고 했다.
이청아 기자 clearlee@donga.com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