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美 핵능력 앞에 차선의 ‘인질 협박’ 한미 확장억제 강화로 의연하게 대응해야
이철희 논설위원
북한 김정은의 대남 ‘제1의 적대국가’ 선언 이후 그 배경을 놓고 국내외 많은 전문가의 분석이 쏟아졌다. 자체 핵·미사일 개발 진전과 러시아와의 밀착에 따른 모험주의 발동, 내부 불만과 동요를 잠재우기 위한 체제 결속용, 나아가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을 내다본 전술적 카드 등 저마다 해석이 다양하다. 사실 그 모든 요인이 계산된, 자신감과 위기감 사이 어디쯤에서 내려진 전략적 선택일 테지만 뭔가 충분치 않다.
이런 분분한 논의 속에 북한의 노선 변경을 생존의 핵전략 차원에서 짚은 동아시아연구원(EAI) 하영선 이사장과 김양규 수석연구원의 이슈 브리핑 ‘북한의 대남 노선전환 바로 읽기’는 눈여겨볼 만하다. 이 글은 미국이 북핵 위협에 “김정은 정권의 종말”을 경고하며 맞춤형 확장억제 전략을 강화하는데도 그에 맞설 실질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북한이 선택한 차선의 대응책이 바로 “대한민국의 궤멸”을 내세운 ‘북한식 맞춤형 핵위협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북한이 핵무장을 했다지만 보유 핵탄두가 미국의 100분의 1 수준에 불과하고 기술적 한계도 분명한 처지에서 ‘공포의 균형’을 통한 상호 억제는 이뤄질 수 없다. 더욱이 미국은 전술핵탄두를 F-35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는 신형(B61-12)으로 교체하는 등 한층 첨단화한 억제력을 구축했다. 그러니 대미 억제라는 북한 핵무기의 ‘제1사명’은 작동 불가능해졌고, 결국 ‘제2사명’에 매달리며 동족을 적국으로 겨냥했다는 진단이다.
그렇다고 위기감이 전부는 아니다. 날로 격화하는 신냉전 기류에서 지금이야말로 판을 흔들 절호의 기회라는 호기로운 계산도 엿보인다. 나아가 한미 동맹을 ‘방기와 연루’의 딜레마에 빠뜨리려는 이간책도 숨어 있다. 연말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북한이 대남 위협 수위를 높일수록 한국에선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이, 미국에선 북핵을 사실상 용인하는 협상론이 고개를 들 수 있는 수상한 시절이니 더욱 그렇다.
당장 김정은의 거친 협박에서 ‘전쟁하겠다는 결심’을 읽었다는 미국 전문가도 있지만 그런 무모한 공멸(共滅)의 길로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무력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은 다분하다. 그래선지 요즘 미국에선 한국의 과도한 대응이 자칫 확전으로 이어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온다. 한국의 ‘몇 배 응징’을 말리되 조심스럽게 설득할 것을 주문하는 전문가도 있다.
올 한 해 한반도는 어느 때보다 아슬아슬한 위기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가 세운 기념물마저 “꼴불견”이라며 철거를 지시한 김정은의 불경스러운 언사도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EAI 보고서 진단대로 북한은 스스로 미국의 압도적 억제력 앞에 무력함을 드러냈다. 정권 종말의 위기감을 대남 인질 위협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 한계도 곧 깨달을 것이다.
경찰 총에 조준된 강도보다 칼부림을 협박당하는 인질의 처지가 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북한 위협의 칼끝에 있지만 그럴수록 의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자체 핵무장론에 흔들리며 우리 내부, 나아가 동맹 간 균열을 내기보다는 확장억제의 실효성을 더욱 강화하고,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하되 절제된 대응으로 긴장을 관리해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