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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교육·문화독립운동가로 이제야 평가받는 인촌 김성수

입력 | 2024-03-08 14:00:00


신당을 차린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윤석열 정권 ‘조기종식’이란 말을 달고 산다. 총선 목표가 검찰정권 조기종식이라며 대통령 탄핵이란 단어까지 입에 올린다. “좀 더 나아가면 내란 선동”이라는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 말을 굳이 전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지난 대선 패배 뒤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이해찬이 했던 말은 전하고 싶다. “5년은 금방 간다.”

2심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만 남은 조국에겐 단임제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 반도 너무 길 것이다. 안다. 하지만 오늘은 총선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미 정해진 대통령 임기 5년도 어떤 이에게는 죽도록 길 수 있다는 사례로 드는 것 뿐이다. 그래서 만약, 눈 떠보니 조국(祖國)은 식민지가 됐고 언제 독립할지 기약없는 100여 년 전이었으면 어땠을지 묻고 싶은 거다.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념사를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재 신채호는 1923년 ‘조선혁명선언’에서 2000만 민중에게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했었다.


● 단재 신채호, 교육·문화독립운동을 ‘적’으로 규정 
교과서에선 단재를 독립운동가·역사가로 배웠지만 기실 그는 교육적, 문화적, 외교적으로 독립을 추구한 이들을 무조리 ‘적’으로 규정했던 혁명가였다(죽창가를 부르던 조국과 흡사한 점이 없지않다). 그러나 따져보자. 단재 자신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지만 2000만 백성 전부가 단재처럼 나라를 떠날 순 없다. 더구나 그땐 지금의 조국처럼 3년 반만 기다리면 정권이 바뀌도록 정해진 상황도 아니었다. 언제 독립될지, 그런 날이 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단재는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조선혁명선언에서 개탄했다.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 ·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어 대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주장했다. 그래놓고 이듬해인 1924년 동아일보 1월 1일자 전면에 ‘조선고래(古來)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이라는 글을 실었으니 신문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다(1936년 그의 옥중 순국 기사 역시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단재 신채호가 1924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면에 기고한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왼쪽 아래는 신채호가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6년 2월 23일자 기사.

외교독립운동에 대해서도 단재는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중략) 국가 존망·민족사활의 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며 폄훼했다.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하는 이 글을 쓴 시기엔 무장투쟁만이 피 끓게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100년 전 조선 땅에서, 그 후로도 한참동안 조선총독부 아래 자식들 공부시키며 먹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모조리 총칼 들고 나서긴 힘든 일이다.


● 교육과 문화독립운동 평가한 3·1절 기념사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 이 땅에서 펼쳐온 ‘다양한 운동’은 제 몫의 평가를 받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우리를 지배해온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상당부분이 의열단 선언 같은 혁명적 사고에서 비롯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3·1절 기념사는 지금껏 가려져 왔던 국내에서의 교육·문화독립운동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국내외에서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무장독립운동을 벌인 투사들이 계셨습니다. 국제정치의 흐름을 꿰뚫어 보며, 세계 각국에서 외교독립운동에 나선 선각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과 문화독립운동에 나선 실천가들도 계셨습니다.”

동아일보가 민중 교육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한다고 알린 1931년 7월 16일자 기사.

짐작하시겠지만, 여기서 ‘교육과 문화독립운동에 나선 실천가들’은 인촌 김성수 선생 등을 염두에 둔 것이다(대통령실의 한 수석도 그렇게 확인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모든 선구적 노력의 결과였다”며 “이 모든 독립운동의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기념사에서 강조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의외로 잘 안 알려진, 동아일보 사람들한테는 참 자랑스러운 3·1운동과 인촌, 대한민국 근대화와 인촌에 대해 전하고 싶다.


● 상층 지주가 근대화에 기여한 유일한 한국
근대 이전의 사회는 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진 계급사회였다. 만일 눈 떠보니 당신의 부친이 상층계급 지주라면, 축하한다. 그들이 사회적 책임을 기꺼이 지는 나라라면, 국민도 해피할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그런 나라는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 이승렬은 오늘날 한중일 삼국 차이가 상층 지주세력에서 성장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존재 여부에서 비롯됐다고 본다(2021년 벽돌책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일본 지주들은 청일-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력한 관료제와 군에 휘둘려 군국주의에 포획됐고, 패전 뒤에도 자유주의로 정착하지 못해 지금도 자민당 거의 일당 체제다. 중국 지주 역시 농업관료제에 기생하다 1911년 신해혁명에서 좌절하고 국공내전서도 패했다. 하층 농민에 기반한 공산당은 전체주의 일당독재에서 현재 거의 시진핑 황제체제다.

반면 한국은 진취적 지주 엘리트가 자유주의 세력을 형성해 근대화를 이끌고, 의회주의를 주도한 나라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던 서울경기, 충청과 황해도 지주 다수는 일본에 협력했지만(이회영 일가 등 소수는 망명해 독립운동) 변방인 호남 지주세력은 달랐다. 농업관료제(의 수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 개항 후 기업형 농업과 미곡무역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젊은 부르주아지 2세들은 일본 유학으로 세상 변화를 깨우쳤고, 나라와 미래를 고민했다.


● 중앙학교 숙직실은 3·1운동의 산실

1919년 촬영된 중앙학교 숙직실. 이 곳에서 인촌은 송진우, 현상윤 등과 3·1 운동을 계획했다.

축적된 부와 지식을 그들은 자신만의 부귀영화에 쓰지 않았다. 교육과 문화 그리고 경영에 헌신하며 온건한 민족주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 중심인물이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1891~1955)였다.

서울 계동의 중앙학교 숙직실은 젊은 인촌의 살림집이자 고하 송진우(1890~1945), 기당 현상윤(1893~1950) 등 동경유학생 출신 중앙학교 교사들이 학교와 민족의 장래, 세계정세를 통론하는 민족 수재들의 사랑방이었다. 3·1운동의 산실도 이 작은 기와집이다. 화제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3·1운동을 이끈 배경에 이승만 박사가 있다고 보는데 동아일보사가 1985년 발행한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 이승만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파리)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 바란다.”’


● 기미독립선언 33인에 인촌이 빠진 이유
하지만 이승만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이승만이 직접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기획하거나 지시한 사실은 없다고 박명수 서울신학대 명예교수는 2023년 논문에서 밝혔다(‘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미친 미주 독립운동의 영향’). 다만 당시 이승만의 명성이 매우 높아서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다.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표지

“계동 김성수의 사랑방에는 1880년대와 1890년대 태어난 고학력 엘리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 경제 언론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났던 국내의 온건한 민족운동에 관여했다”고 이승렬은 저서에 썼다. 인촌과 고하, 기당이 일본유학시절 만든 동경유학생회에서 2·8독립선언서를 들고 찾아온 곳도 바로 계동 사랑방이었다.

3·1운동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대표들을 한데 모으는 데는 중앙학교에 뭉친 이들 진취적 부르주아지 2세대가 가교 역할을 했다. 이들은 위계를 따지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독립의 목표로 공존공영과 평화를 주장했다. 이 새로운 ‘정치적 인간’들이 한국 시민계급의 초석을 놓으면서 자유주의 세력을 확장하여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이승렬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기미독립선언 33인’에 인촌의 이름이 빠진 이유가 있다. 고하의 우격다짐같은 권유로 인해서다.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정말 일조일석, 단판 승부로 얻어지는 건 아닐거야. 밤새도록 혼자 생각해봤는데 이 운동은 영구적인 투쟁이 돼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네…(중략) 성수가 투옥되면? 우리 중앙학교 역시 당장 폐교야!…(중략) 자금은 대줘도 그 자취는 남기지 말고 비밀회의 같은 외부회의에는 나가지 말고!”(‘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 공선사후(公先私後)와 친명횡재는 상극
인촌은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의 교육을 통해 근대 시민을 길러냈다. 1919년 경성방직 설립은 경제의 근대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은 사상의 근대화와 관련이 있다고 이승렬은 썼다(그래서 그의 책 제목이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이다). 우리 헌법 1조 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박사 역시 인촌이 인수한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다.

민주주의는 알겠는데 공화주의는 추상적이고 어렵다. 모두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적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을 중시한다는 개념. 우리 사무실엔 ‘공선사후(公先私後)’라는 인촌 정신을 쓴 액자가 걸려 있다. 공사가 부딪힐 땐 무조건 공을 최우선으로 중시하고, 사적인 일은 나중으로 돌리는 것(하다못해 밤중에 취재와 집안일이 겹칠 때도 취재가 먼저였다). 나는 이것이 공화주의를 실천하는 가장 쉽고도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촌은 1946년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맡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최근 횡행활보하는 민주당 ‘친명횡재-비명횡사’ 공천은 공선사후와 완전상극이다.

‘전북 고창과 전남 담양은 개항 이후 미곡시장이 확대되면서 상업적 농업을 통해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조선왕조의 주변부여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시대 변화에 민감했으며 차라리 근대화와 학습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열기도 충만했다. 특히 김성수는 지역 인물과 재력을 연결하는 독특한 역할을 했고, 그 이면에는 열린 자세로 뒷받침했던 부모 세대의 노력과 재력이 있었다.’ 이승렬은 저서에 적었다. 호남은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들을 키운 땅이었다. 그랬던 호남이 100년 후 광주엔 복합 쇼핑몰 하나 없는 ‘민주당 식민지’ 처럼 되고 말았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