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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하는 가문정치”… 선거 치러도 이어지는 ‘현대판 왕조’ [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4-03-09 01:40:00

동남아 권력자들의 ‘세습 정치’
동남아에선 ‘세습 통치’ 여전히 많아… 캄보디아 전 총리는 장남에게 대물림
인니 조코위, 세습 위해 정적과 협력… 국민은 정치력도 유산으로 인식
능력 보이면 도덕적 하자 묵인… 정치 무관심한 젊은층 많은 탓도
일각 “세습으로 나은 미래 보장 안 돼… 독재 역사 가리는 헛된 꿈” 지적도




2024년이 ‘슈퍼 선거의 해’라는 건 이제 그리 낯선 얘기가 아니다. 다음 달 총선을 치르는 한국을 비롯해 76개국에서 올해 크고 작은 선거를 치른다. 하지만 어떤 나라들은 선거와 상관없이 권력자가 변하지 않고, 심지어 선출 공직이 핏줄로 대물림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동남아시아는 그런 의미에서 무척 유별나다. 세계 인구 순위 4위인 인도네시아(약 2억7753만 명)와 8위 방글라데시(약 1억7295만 명)를 비롯해 캄보디아, 필리핀, 싱가포르가 아들 혹은 딸이 권력을 물려받았다. 태국도 과거 총리의 여동생과 매제가 총리에 오르더니 이제 딸이 유력한 총리 후보로 등극했다. 이들 여섯 나라 인구를 합치면, 6억6200만 명이 넘는 동남아 국민들이 ‘세습 통치’를 받고 있는 셈이다.

자그마한 소식도 소셜미디어를 타고 순식간에 세계로 퍼지는 시대에, 버젓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피의 대물림이 가능한 이유가 뭘까. 더구나 이들 나라 다수는 세습 가문이 국민적 지지가 높아 억압 통치를 한다고 보기도 힘들다. 외교 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의 칼럼니스트 제임스 크랩트리는 “서구권 민주주의 국가수반들은 대체로 국민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동남아 지도자들은 집권 이후에도 인기가 놀랍도록 높다”고 평가했다. 세습이란 키워드를 통해 동남아 국가 특유의 정치문화를 살펴봤다.

● 캄보디아-태국 ‘정치 왕조’가 권력 독점

최근 이뤄진 가장 극적인 세습 정치 사례는 캄보디아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장남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물러났던 ‘아시아 최장수 지도자’ 훈 센 전 총리(72)가 1년도 안 돼 다시 정치 일선으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 의장을 맡고 있는 훈 센은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상원의원 선거에서 CPP가 압승을 거두며 상원의장이 확실시 된다. 지난해 8월 장남인 훈 마네트에게 총리직을 물려준 지 6개월 만이다.

훈 센은 1985년 33세에 당시 세계 최연소 총리가 된 뒤 38년 동안 캄보디아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긴 세월 동안 그는 장남은 물론이고 온 가족을 권력 요직에 앉혀 ‘훈 왕조’를 만들었다. 3남인 훈 마니와 조카사위 네트 사보에운은 부총리이며, 차남 훈 마니트는 국방부 최고위 간부다. 훈 센은 심지어 3년 전 공개석상에서 “2023년 이후 총리의 아버지가, 2040년 총리의 할아버지가 되겠다”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다.

인도네시아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14일 대선에서 당선된 인물은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73)이지만 실제 승리는 조코 위도도(조코위) 현 대통령이 거머쥐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의 장남인 기브란(37)이 프라보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오르기 때문이다.

프라보워와 조코위는 2014, 2019년 대선에서 두 차례나 맞붙었던 오랜 정적(政敵)이다. 하지만 권력을 위해 손을 잡으며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사실 조코위는 임기 10년 동안 매우 인기 높은 대통령이었다. 자수성가한 서민 출신으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까지도 지지율이 70%대에 이르렀을 정도다. 하지만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고 선거법 개정 등 온갖 편법을 자행하면서 그간의 명성에 빛이 바랬다.

방글라데시나 싱가포르, 필리핀은 두 나라에 비하면 보다 ‘매끄럽게’ 세습이 진행 중이다. 방글라데시는 1월 총선에서 ‘국부(國父)의 딸’이자 2009년 총리에 오른 셰이크 하시나(77)가 5연임에 성공했다. 여기서 국부란 초대 대통령과 2대 총리를 지낸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을 일컫는다. 1975년 쿠데타로 일가족과 함께 살해당했지만, 당시 서독에 있던 딸 하시나는 1981년 귀국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총리가 실권을 쥔 싱가포르에선 2015년 별세한 초대 리콴유 총리의 장남 리셴룽(72)이 2004년부터 집권 중이다. 지난해 그는 2025년 총선 전에 로런스 웡 부총리에게 권력 이양을 약속했지만, 현지에선 차남 리훙이(37)의 ‘3대 세습’ 가능성도 작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필리핀의 경우 202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67)이 당선되며 20년간 철권통치를 했던 아버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 이어 ‘부자(父子) 대통령’이 됐다. 함께 당선된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46)도 전직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이다.

태국에선 2001∼2006년 총리를 지낸 탁신 친나왓(75) 일가의 세습이 엄청나다. 매제와 여동생도 총리를 지냈으며, 그의 딸이자 현 집권당인 프아타이당의 패통탄 친나왓 대표(38)도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다.

● ‘가문 정치’ 익숙해 공사 구분 옅어

동남아에서 권력 세습이 잦은 까닭은 공과 사를 칼로 자르듯 구분하지 않는 문화적 특성도 한 가지 주요 요인이다. 장준영 사이버한국외국어대 베트남·인도네시아학부 교수는 동남아의 ‘가문 정치’에 대해 “오랜 세월 관료제가 발달해온 동북아시와와 달리 동남아는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뤄지지 않고 지역별 토착 세력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설명했다.

일부 국가는 근현대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도 세습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필리핀은 스페인 지배 시절 효율적 통치를 위해 소수 현지인에게 정치적 역할을 맡겼다. 이때 친스페인 가문이나, 반대로 독립운동을 했던 엘리트 가문들이 현재 필리핀 사회의 ‘정치 왕조’로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물과 가문의 ‘명성’이 곧 능력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동남아 문화의 특성이다. 박정훈 부산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는 “유명 정치인을 중심으로 재력가가 모이고 이권이 배분되면서 이들의 네트워크가 더 강하게 결집하는 순환이 되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던 박 교수는 “현지 유권자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 업적을 물려주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냐’고 하더라”며 “카리스마와 정치력이 대대로 이어지는 일종의 ‘유산’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짚었다.

국제 정세가 날로 급변하면서 정치 지도자로 ‘스트롱맨’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추세도 한몫했다. 인도 태생의 사회비평가인 살릴 트리파티는 “전투적인 성격의 프라보워는 ‘인도네시아는 다른 국가에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어필했다”며 “이런 강한 모습이 유권자들에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 고학력자 적고 ‘틱톡’ 의존 큰 젊은층
동남아는 한국이나 일본,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의 나이대가 젊다. 인도네시아는 유권자의 52%가 17∼40세일 정도다.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젊은 세대가 두꺼운 게 동남아에선 정치 세습에 보탬이 되고 있다. 중장년층은 이런 문화가 익숙한 ‘지지층’이고, 청년층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데다 교육 수준도 낮아 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박 교수는 “젊은 유권자 중엔 정치 변혁을 주도할 만한 고학력 중산층이 적어 세력 결집이 힘들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25∼34세 인구 중 대졸자 비율이 2022년 기준 18%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47%)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등교육 이수 비율도 2022년 기준 캄보디아는 15%, 방글라데시는 23%, 필리핀은 35%로 매우 낮은 편이다.

반면 소셜미디어 틱톡 사용자 수는 상위 10개국 절반이 동남아 국가일 정도다. 인도네시아는 젊은층에 인기 있는 틱톡이 선거전에서 핵심 홍보 창구였다. 이들은 철권통치기 경험이 없어 프라보워가 과거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했던 오점에 큰 관심이 없었다. 결국 유세 현장에서 막춤을 추는 영상을 틱톡에 올려 ‘귀여운 할아버지’란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미 외교 전문지 더디플로마트는 “비서구권은 소셜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지 않다”며 “젊은 유권자들은 많은 허위 정보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 “민주주의보단 실리가 중요” 인식도
동남아 유권자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가치보다는 실리적인 측면을 더 중시하는 성향도 세습에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 있다.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삼아 ‘선대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도덕이나 규범적 하자가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묵인해 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권력을 물려받은 이들이 앞으로도 ‘성공적으로’ 세습을 이어갈 수 있느냐이다. 인도네시아에선 프라보워와 조코위의 정치적 동맹이 ‘모래 위의 성’일 수도 있다는 전망도 적지 않다. FP는 “조코위의 아들은 아직 정치 경험이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본인이 대통령에 오르기를 꿈꿀 것”이라며 “프라보워가 그를 정치적 위협 세력으로 여기게 되면 지금의 동맹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캄보디아 훈 마네트 총리는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한 이력 때문에 서구권에선 비교적 개방적인 인물이란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조슈아 컬란치크 미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서방의 기대와 달리 훈 마네트가 캄보디아를 개혁할 의지가 있다는 증거는 없다”며 “오히려 (아버지 편이었던) 고위 관료와 재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면 더 많은 부정행위를 저질러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습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할 거란 기대는 어쩌면 독재의 역사를 가리는 헛된 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세계 곳곳 권위주의 부활 징후”… 지난해 167개국 ‘민주주의 지수’ 역대 최악

슈퍼 선거의 해, 슈퍼 민주주의 후퇴의 해 되나
反자유주의 확산되고 있는 시기
77개국 국민 52% 강한 지도자 원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장기 집권 및 세습 정치는 나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근거 있는 명분’이라도 독재를 합리화시킬 순 없다. 동남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에 위기가 도래했다는 징후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달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조사기관 EIU가 167개국을 평가해 집계한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에 따르면 지난해 민주국가는 양적으로 늘었지만 질적으론 떨어졌다. △완전한 민주주의 △결함 있는 민주주의 △민주-권위 혼합 △권위주의 등 4등급 분류에서 완전한 혹은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분류된 국가의 수는 1년 사이 2곳이 늘어 74개국이 됐다. 그러나 세계 민주주의 지수의 평균값은 10점 만점에 5.23으로 종전 역대 최저였던 지난해 5.29에서 더 떨어졌다.

이 가운데 올해 선거를 치르는 56개국을 보면 ‘완전한 민주주의’는 한국과 아이슬란드, 대만 등 7곳(12.5%)뿐이다. ‘결함 있는 민주주의’가 20개국이고, 10개국은 혼합 체제였다. 19개국은 권위주의로 분류됐다.

실제로 세계에서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지난해 77개국 설문조사에서 의회나 선거에 영향받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응답이 52%였다. 2009년 38%보다 크게 오른 수치다. 지난달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24개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도 권위주의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평균 31%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슈퍼 선거의 해’인 올해가 ‘슈퍼 민주주의 퇴보의 해’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선거들은 반(反)자유주의가 확산하고, 민주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실시된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갈수록 정치 권력이 교묘해지며 유권자들의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 편집장을 지낸 정치평론가 모이세스 나임은 “21세기 독재자들은 은밀하게 권력을 사유화하면서도 겉으론 민주주의자를 가장해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의 유럽·유라시아 수석 분석가 마이크 스멜처 역시 “민주주의는 독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며 “가짜 민주주의를 구별해낼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김보라 기자 purp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