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모필레 전투를 다룬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정복자이자 침공자인 자신을 “나는 관대하다”라고 표현한다. 역사에 크세르크세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크세르크세스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기는 했다. 그는 멋진 황제가 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신하들을 우대하고, 황제의 품위와 권위를 세우면서도 말투와 행동은 억지스럽지 않았다. 적, 특히 항복하거나 망명해 온 적은 진심으로 관대하게 대했다. 나라 살림과 군대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학 교과서가 있다면 훌륭한 황제의 언행은 모두 실천하려고 했다.
황제에게 관대함은 특히 중요한 미덕이었다. 페르시아는 영토 내에 50개가 넘는 종족, 부족이 살았다. 이런 다양함을 통치하려면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페르시아도 그렇고 로마도 그렇고, 제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해와 납득 가능한 법과 제도, 상식만 용납한다면 제국은 피비린내로 가득해질 것이다.
그러나 황제에겐 두 번째 딜레마가 따라온다. 관용으로 통치가 가능할까? 이해 불가능한 격차가 관용의 정치 조건이라는 말 자체가 관용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크세르크세스뿐 아니라 키루스, 다리우스 2세 등 페르시아의 역대 황제들은 관용을 과시하는 전설적인 일화를 보여주었지만, 모두가 정복 군주이고 큰 전쟁을 일으켰다.
인류는 서로가 관용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관용을 호소하는 방법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인류의 지성이 도달한 지점은 여기까지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