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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라는 사치[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338〉

입력 | 2024-03-12 23:24:00


아들은 오늘도 자신이 10대였을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와 차를 타고 슈퍼마켓에 가다가 도덕심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 “선이라는 사치를 누리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서 너희들이 굶고 있다면 가게에 들어가서 빵을 훔칠 수도 있고, 마약을 팔거나 빈집을 털 수도 있지. 그러니 나도 범죄자보다 나을 게 없단다.

아버지의 말은 아들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았다. 그 말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논란의 여지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머금고 있는 충격적인 진실은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주었다. 나중에 보니 토머스 네이글 같은 철학자도 도덕적 행동이 “카드놀이처럼 운에 좌우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한 사람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거다. 아들아, 앞으로 세상을 살다가 누군가를 섣불리 욕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아라.

조너선 갓셜이라는 학자가 ‘호모 픽투스의 모험’에서 전하는 이야기다. 그는 그런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들을 위해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살았던 쌍둥이 젊은이가 있었다고 하자. 한 사람은 나치가 들어서기 전에 미국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독일에 남는다. 전쟁이 일어나자 하나는 미국을 위해, 다른 하나는 독일을 위해 싸운다. 전쟁이 끝나자 하나는 미국의 전후 부흥을 이끈 세대로, 다른 하나는 나치 악당으로 기록된다. 미국에 사는 쌍둥이도 독일에 남았더라면 악당으로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선이나 악이라는 것이 타고난 성격적 특질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발현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도 불운하거나 신의 은총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으니, 자신의 운과 은총에는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불운에는 공감적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거다.


왕은철 문학평론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