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가 한 달이 돼갑니다. 대학병원에서 수술과 항암치료가 미뤄지고 있습니다. 교수들도 단체로 흰 가운을 벗는다고 합니다. 의료 혼란이 ‘대란’을 넘어 ‘재난’이 될까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재난의 피해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별 영향이 없습니다. 병든 사람이 더 아파집니다. 돈 잘 버는 ‘피부미용’ 의사는 큰 타격이 없습니다. 원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처참했던 필수의료 의사만 잠을 줄이며 진료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약자를 가장 먼저 덮치는 재난의 속성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번 사태는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비대면 진료를 떠올려봅시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의협 비상대책위원회가 전국의사궐기대회를 열고 정부의 의료 정책을 관에 담아 매장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습니다. 2024년 3월이냐고요. 아닙니다. 2013년 12월 15일입니다. 당시 의협은 정부의 원격의료(비대면 진료) 추진 등에 반발했고, 2014년 3월엔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정부는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2월 24일부터 전국 병의원에서 전화 상담과 처방을 전면 허용했습니다. 병원 내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 병원이 감염의 온상이 됐던 악몽도 빠른 대처에 한몫했을 겁니다.
그 후 지난해 1월까지 약 2년 11개월간 1379만 명이 3661만 건의 비대면 진료를 이용했습니다. 2022년 한 해만 따져도 약 3200만 건. 즉, 하루 8만 건이 넘었습니다. 별다른 안전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의사도 지금은 크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멈춰있던 개혁의 시계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계기로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를 과학계에선 ‘자연실험’이라고 합니다.
2월 20일 광주 동구 전남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사설 구급차에 실리고 있습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실제로 전공의 인력에 의존해 왔던 상급종합병원은 입원 환자를 평소보다 30~40% 줄였습니다. 반면 인근 종합병원은 북새통을 이룹니다. 서울 A종합병원은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 이후 평소 50~60%였던 병상 가동률이 97% 수준으로 올랐습니다. 약 4km 떨어진 ‘빅5’ 상급종합병원 중 한 곳에서 환자들을 내보내자 그중 일부를 A종합병원이 받게 된 겁니다. 환자 대다수는 경증이라서 A종합병원의 역량으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응급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부에 따르면 6일 기준 응급실을 찾은 경증 환자는 지난달 1~7일 평균 대비 29.3% 줄었습니다. 최근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선 원래 이 병원에 다니던 말기 암 환자가 배에 물이 차서 그걸 빼달라며 응급실을 찾았는데 받아주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정도 시술은 가까운 병원에서 해도 되지만, 그동안은 ‘팔로업(기존) 환자’라면 상급종합병원에서도 받아주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이젠 도저히 이런 환자까지 받아줄 여유가 없으니 돌려보낸 거죠. 해당 환자는 119구급대가 몇 시간 후 인근 종합병원 자리가 나서 데려가 줬고, 무사히 치료받았다고 합니다. 모처럼 응급실이 정상적인 모습을 찾은 사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간 정부와 의료계는 대형병원 쏠림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상황은 오히려 악화일로였습니다. 그런데 전공의의 부재가 뜻하지 않게 ‘의료 전달 체계 정상화’의 자연실험을 촉진하고 있는 겁니다.
자료: 통계청 ‘통계플러스’ 2023년 여름호 54쪽. 코로나19 시기 초과사망 분석.
전공의가 병원 진료의 상당 부분에 직접 참여하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의술은 피아노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강의실에서 아무리 오래 수업하고 악보를 들여다봐도 그것만으로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죠. 직접 피아노를 쳐보고 옆에 앉은 교사가 실수를 바로잡아줘야 실력이 늡니다. 전공의 교육이 도제식인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지난해 6월 충청 지역의 한 국립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병동 복도에서 한 전공의가 카운터 앞에 선 채 엎드려 지친 몸을 잠시 기대고 있습니다. 충청 지역을 통틀어 그해 새로 들어온 소청과 전공의는 이 의사뿐이었습니다. 청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합니다. 병원들이 몸값 비싼 전문의를 고용하는 데 인색해지고 인건비가 훨씬 낮은 전공의를 선호하게 되는 겁니다. 전공의 3, 4명을 고용할 돈으로 전문의 1명을 뽑으면 병원장 입장에서는 ‘배임’ 아닐까요? 지금 구조가 그렇습니다. 전문의 입장에서는 전공의 수련을 마쳐도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려우니 아예 필수의료 분야에 지원하지 않는 악순환이 생기는 겁니다.
정부는 ‘전문의 중심병원’을 구축하겠다고 합니다. 전공의에게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병원 진료는 전문의가 중심적으로 수행하도록 구조를 바꾸겠다는 얘깁니다. 그러면서 각 병원이 필요 의사 인력을 확보했는지 따질 때 전공의는 1명이 아닌 0.5명으로 치겠다는 대책을 내놨습니다. 그만큼 전문의를 더 고용하게 유도하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 기준만으로 전문의 고용을 늘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지금 병원에서 전공의 1명은 전문의 0.5명분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문의 2, 3명이 할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공의 대신 전문의를 채용하면 병원은 그만큼 손실을 보는데, 정부가 이를 보전하기 위해 예산을 얼마나 쓸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전공의협회 측이 “정부가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과 재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라며 복귀를 거부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간단한 계산법이 있습니다. 지금 상급종합병원에서 적자가 얼마 나는지 보는 겁니다.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은 전공의가 떠난 후로 하루 15억 원 안팎의 적자가 난다고 합니다. 이 병원 전공의 740명의 하루 인건비가 약 1억 원입니다. 서울대병원은 전공의의 격무 덕분에 하루 약 14억 원을 벌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1년이면 약 5100억 원입니다. 아주 거친 계산법이지만, 병원 1개를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적잖은 돈이 들어간다는 건 추산할 수 있습니다. 그 돈을 어디서 끌어올 수 있을까요? 지금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는 정부와 의료계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하는 건 이런 주제가 아닐까요.
그간 보건의료 분야에서 특정 직군의 업무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는 다른 직역 단체의 반발로 무산되기 일쑤였습니다. 대표적인 게 응급구조사입니다. 응급구조사는 119구급대와 응급실 등에서 활동하는데, 2000년 응급의료법이 개정된 이후 업무 범위가 혈압 측정 등 14가지로 제한돼 있습니다. 심근경색 환자의 심전도를 재지 못하고, 응급 분만 산모의 탯줄도 자를 수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려고 하면 임상병리사 단체나 간호사 단체가 들고 일어나 막았습니다.
PA 간호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양성화하려는 시도가 수십 년간 의협을 포함한 다른 보건의료 직역 단체의 격렬한 반발 탓에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런데 전공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긴급 조치라는 명분으로 ‘전면 합법화’에 가까운 조치가 곧장 현장에서 적용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간 필수의료 인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의사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비(非)의사 직군의 업무 범위도 넓혀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이를 실행에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정부로선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겁니다.
대한간호협회(간협)의 PA 간호사 활동 실태 보고서와 함께 복지부 내 PA 간호사 양성화 추진 움직임을 보도한 2011년 12월 28일자 동아일보 A12면. 하지만 이때도 검토는 검토로만 끝났습니다. PA 합법화는 지금껏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기준이 엄밀하지 않으니 시범사업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번 시범사업을 계기로 비(非)의사 직군이 해도 되는 의료행위가 어디까지인지 한 테이블에 놓고 진지하게 논의해 보자는 겁니다. 논의의 중심은 ‘직역의 이해’가 아니라 ‘환자의 최선’이어야 합니다. 만약 정부가 이번 시범사업을 ‘전공의 압박용’으로 쓰고 사태가 끝나자마자 없던 일로 해버린다면 수많은 환자를 살릴 잠재적인 기회를 잃게 되는 겁니다.
의협도 ‘문신사 신설’ 같은 정책은 좀 반대하지 맙시다. 문신 권한을 지금처럼 의사가 독점한다고 해서 의사가 타투샵 차릴 건 아니잖습니까. 필러나 피부 레이저 시술을 꼭 의대 교육 6년, 전공의 수련 4년 밟은 의사가 해야 합니까. 계속 그런 주장만 되풀이할 거면 ‘필수의료 전문의가 피부미용 의원으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호소하면 안 됩니다.
간호 인력 얘기도 툭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일부 상급종합병원이 요즘 수술실 간호사들에게 무급 휴가를 권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수술실을 못 돌려서 돈을 못 벌고 있으니 간호사들은 무급으로 쉬라는 얘긴데, 사실은 간호사 1명당 환자의 비율은 지금 정도가 딱 맞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간호사 대비 입원환자가 너무 많으면 ‘간호관리료’를 깎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되는 간호사 1명당 환자 수가 상급종합병원은 19.2명, 종합병원 28.8명입니다. 국내 최고 병원에서도 간호사 1명이 환자를 19.2명까지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선진국이랑 비교하기 민망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간호사 1명당 환자가 5명이 넘어가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8명입니다.
전공의 사직으로 입원환자가 갑자기 줄어드는 바람에 간호사 1명당 환자를 5명 정도만 돌보게 된 이 상황이 바로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주목할 건, 거꾸로 말하면 병원들이 간호사에게 무급 휴직을 종용할 정도로 우려하는 적자를 누군가 메꿔주지 않으면 선진국형 간호 비율은 달성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4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제2차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안)’.
그런데 1년 가까이 지난 지금쯤 재원에 대한 논의가 진전됐어야 하는데, 들려오는 소식이 없습니다. 이래서야 간호사 단체가 정부를 믿을 수 있을까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돈이 들어서 그런 거면 시간 끌지 말고 솔직히 공개하고 공론에 부치는 게 옳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국민 동의도 필요합니다. 의료 전달 체계를 정상화한다는 건 아무나 상급종합병원에 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뜻입니다. 중증·응급질환의 건강보험 수가를 올린다는 건 건강보험료를 더 내거나 경증으로 진료받을 때 병원비를 더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5일 밤 경기 구리시 한양대 구리병원에서 야근하던 응급의학과 김창선 교수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전공의 이탈 전까지 4명이 지켰던 이 응급실에는 이날 김 교수뿐이었습니다. 구리=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정부는 의사 인력 증가는 필수의료 정상화의 필요조건일 뿐이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패키지를 병행하겠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정책 패키지를 위한 재원과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어딨습니까. 그동안 ‘밥그릇’보다 환자를 먼저 생각했던 의사들조차 “정부가 의대 정원 늘리고 나면 정책 패키지는 내팽개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합니다. 그걸 정부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마저 의사에게 밀리면 더는 미래가 없다’는 위기 의식을 안고 있는 듯합니다. 정부가 의사를 이겨도 결국 재난의 피해는 아픈 사람들이 떠안습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