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북한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김정은이 남·북한을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한 데 이어 최근 대남기구 폐지 등 후속 조치를 연이어 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각종 기록영화 배경에 찍힌 한반도 이미지를 북한 영토로 수정하는 디테일까지 발휘하고 있죠. 이제 정말 북한이 민족통일을 포기한 것일까.
그런데 이보다 더 주의를 끄는 건 김정일 집권 당시 3년의 유훈통치 기간을 둘 정도로 선대 수령의 교시를 절대시하는 북한에서 수령이 앞장서 민족통일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김일성-김정일은 생전에 마르고 닳도록 ‘자주적 민족통일’을 강조했죠.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이른바 NL(민족해방) 계열의 학생운동권이 북한에 밀착된 것도 북한 통일관의 영향이 컸습니다. 한반도 통일에서 ‘민족 담론’의 포기가 남북한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얼까요.
김일성 민족통일론 폐기한 김정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적대적 2국가론’을 발표했다. 조선중앙TV
사실 김일성이 제기한 북한의 민족 통일론은 단순한 정치 전술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북한에서 민족주의는 1960년대 후반 유일 지배체제를 구축하면서 제기된 주체사상과 직결되죠. 1960년대 첨예한 중소 갈등 와중에 김일성이 친중파(연안파)와 친소련파를 제거한 핵심 명분이 ‘민족 자주’였기 때문입니다.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겠다는 김일성의 명분론이 북한에서 먹힌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덕분입니다. 엄혹한 일본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이른바 ‘저항적 민족주의’가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민중들의 심장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외세=악의 세력’이라는 흑백논리가 김일성이 친중, 친소파를 제거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죠.
1인 지배체제 구축을 계기로 주체사상이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규율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하면서 주체사상과 결합된 ‘북한판 민족주의’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게 됩니다. 예컨대 김일성은 1983년 연설에서 “오늘 신흥세력 나라들이 건설하여야 할 참다운 민족문화는 주체가 선 문화, 주체적인 문화입니다. 주체적인 문화란 자기 민족의 특성과 자기 나라 혁명의 이익에 맞는 문화이며 인민대중이 그 창조자로 되고 향유자로 되는 문화입니다”라며 문화영역에서도 ‘주체적 민족 문화’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주체사상이 확립되기 전에는 북한에서 민족주의는 일종의 금기어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국제 공산주의’를 신조로 여기는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서 민족주의는 일종의 ‘독소’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맞서는 계급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민족을 뛰어 넘어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남북한 통일담론의 적대적 의존성
1972년 남북한의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앞서 5월 3일 김일성 당시 수상을 접견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남북대화사료집
1972년 말 작성된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 내부 보고서는 그해 발표된 남한 유신헌법과 북한 사회주의 헌법의 유사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북한 당국 간 정보 공유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두 헌법 모두 그해 남북한 정부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합의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발표됐죠.
박정희가 1972년 10월 발표한 ‘10월 유신’은 미중데탕트로 초래된 미군 철수 등 안보 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분 하에 장기집권의 길을 연 초헌법적 조치입니다. 그런데 같은 해 김일성도 주체사상을 헌법조문에 규정함으로서 1인 지배체제에 쐐기를 박습니다. 민족통일을 남북한의 국내정치에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이를 두고 학계 일각에선 당시 남북한이 ‘적대적 의존관계’였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에 이어 유신체제가 등장했을 때 남북한의 대응이 이런 맥락에서 특히 눈길을 끕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유신 발표에 앞서 북한 고위층 접촉을 통해 이해를 구하는 등 남북대화 유지에 공을 들입니다. 유신 선포의 명분 중 하나가 평화통일 추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진의는 평화공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1972년 11월 8일 북한 외교부 부부장 이만석은 평양 주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대사에게 “북한이 남한의 유신 조치를 비판하면 야당이 더 탄압받는 결과를 초래해 ‘남조선 혁명’을 전개할 수 있는 입지와 공간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정부 세력을 통해 남한 정부를 흔들려는 목적으로 남북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유신에 대한 비난을 삼갔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한의 민족통일 담론은 국내정치적 목적과 체제 경쟁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물론 남한 민주화 이후의 통일 논의는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라졌지만, 남북한 모두 국내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을 부인하긴 힘듭니다. 반민족, 반통일로 돌아선 북한을 대신해 민족통일의 비전을 세워야하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요.
[참고 문헌]
-전미영 〈통일 담론에 나타난 남북한 민족주의 비교연구〉(국제정치논총 43집 1호, 2003년)
-신종대 〈유신체제 수립을 보는 북한과 미국의시각과 대응〉 (아세아연구, 2012년)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