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년 3월 16일(음력 2월 1일)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 앞 들판에서 강감찬의 고려군과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격돌했다. 거란군으로서는 최후의 고비였다. 이 전투에서만 승리하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려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섬멸해야 하는 전투였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고려군이 패하거나 거란군이 큰 희생 없이 빠져나간다면 거란군이 또 침공해 올 수도 있었다. 993년에 시작된 고려-거란전쟁은 거의 30년째 지속되고 있었다. 고려, 거란의 병사 중에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참전한 병사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남편과 자식,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여인들도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귀주대첩은 감격스러운 승리였지만, 이 승리로도 막을 수 없는 비극이 무수히 많았다. 포로가 되어 고려나 거란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천민이었던 양수척이 거란의 후예라는 말도 있지만, 양수척도 그렇고, 거란으로 끌려간 고려인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잊혀졌거나 혹은 고의로 외면한 탓에 전하지 않는다. 고려인이든 거란인이든 포로가 된 후에도 20년, 30년 지속되는 전쟁 중에, 분노한 주민들로부터 이들이 엄청난 핍박과 탄압을 받았으리라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귀주대첩의 소식이 거란에 전해졌을 때, 거란에 있던 고려인들은 어떤 일을 당했을까?
백성들은 적군에 의한 피해만이 아니라 기아, 가난, 범죄로 고통을 받는다. 전후에 자신을 쏜 적의 병사와 만나서 악수하고, 건너편에서 싸웠던 적의 지휘관을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에게 고통의 기억과 분노는 세대를 넘어 100년이 지나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