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등 ‘로마 3부작’을 발표하며 당대 최고의 관현악법 대가로 인정받은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13일 아네조피 무터 바이올린 리사이틀에 가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올해의 큰 개인적 손실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여러 지인이 레스피기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이날 연주의 백미로 꼽았다.
레스피기라는 이름을 처음 만난 날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1977년 8월 ‘주네스 무지칼 월드 오케스트라’ 한국 대회가 열렸다. 세계 여러 나라의 청소년 연주자들이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합숙하며 연습을 거친 끝에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연습 과정과 그들이 나눈 우정은 TV 다큐멘터리로 방영됐고, 다큐 뒤에는 프랑스인 세르주 보도가 지휘한 콘서트 영상이 함께 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생의 마음을 가장 뛰게 한 것은 레스피기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였다.
4개 악장 중 마지막 부분, ‘아피아 가도(街道)의 소나무’라는 자막이 흘렀다. 고요하게 시작된 행진곡풍 리듬이 점차 고조되더니 금관의 팡파르가 불을 뿜었다. 심벌즈와 공(큰 징), 큰북 등 온갖 타악기가 굉음과도 같은 음색의 불꽃을 뿌려대는 가운데 지휘자는 손을 젓는 것도 잊은 듯했다. 상체를 왼쪽 오른쪽으로 크게 흔들 뿐이었다.
18년 뒤, 20대의 끝자락에서 인생 두 번째 해외여행의 목표지로 이탈리아 로마를 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의 실제 무대를 보겠다는 것과, 로마의 소나무를 만나겠다는 것. 두 번째 꿈은 앨범 속 사진으로 남았다. 밑동이 쳐진 한국 소나무가 아니라 구름을 인 듯한 높은 줄기의 소나무 아래서, 한 젊은이가 어린아이 머리만 한 커다란 솔방울을 들고 웃고 있다.
오토리노 레스피기(1879∼1936)는 오늘날 주로 두 가지 얼굴로 기억된다. 그는 관현악법(오케스트레이션)의 대가였다. 이탈리아에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관현악 거장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배운 그는 로마의 자연과 풍물, 축제의 소란을 거울을 보는 듯한 소리의 풍경화로 악보에 옮겨놓았다.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상기시킨 ‘로마의 소나무’는 파시스트들이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제2차 세계대전 후 그에게 ‘전체주의 협력자’란 의심을 안겨주었지만 오늘날 이는 파시스트들의 그에 대한 짝사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레스피기는 또한 ‘옛 음악 부흥의 선구자’였다. 오늘날에는 공연장에서 바로크 음악을 넘어 르네상스 음악도 자주 만날 수 있지만 그의 생전에는 후기 바로크 음악까지가 실제 연주 음악의 시대적 상한선으로 여겨졌을 뿐 그 이전 음악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 정도로 치부됐다. 레스피기는 도서관에서 찾아낸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들을 근대적 색채로 편곡해 이 ‘조상들 음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오페라 거장인 푸치니가 생전에 가장 높이 평가한 이탈리아 작곡가도 레스피기였다. 푸치니가 오페라 ‘투란도트’ 작곡을 채 마치지 못하고 갑자기 죽자 남은 작업은 이 작품의 초연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했던 흥행사 ‘카사 리코르디’ 소속인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의 몫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푸치니가 자신의 운명을 일찍 알아챘다면 남은 작업을 레스피기에게 맡겼을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그랬다면 ‘투란도트’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완성도 높은 피날레로 기억되고 있지 않을까.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