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가 만개할 무렵의 창덕궁 낙선재 뒤뜰 한정당과 상량정 주변 모습. 문화재청 국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제공
겨우내 굳게 닫혀 있던 창덕궁 건물의 창과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가 이달 5~16일 궁궐에 자연채광을 들이고 통풍을 시키는 ‘창덕궁 빛·바람들이기 행사’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봄바람이 솔솔 드나드는 열린 창호(窓戶)를 통해 전각 내부가 들여다보였습니다. 이토록 살아있는 풍경 액자가 있을까요. 바람이 통하는 궁궐은 ‘아, 이곳에 사람이 살았었지’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열어놓은 창과 문을 통해 보이는 한국의 궁궐은 차경의 백미다. 김선미 기자
봄을 맞은 창덕궁은 평소 보기 힘들었던 모습을 요즘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인정전 내부입니다. 1985년 국보로 지정된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왕위 즉위식 등 조선의 공식 행사가 열렸던 곳입니다. 문화재청은 이달 31일까지 매주 수∼일요일 인정전 내부를 관람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이달 말까지 인정전 내부 관람이 가능해 어좌 위의 봉황 부조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김선미 기자
인정전 내부에 들어서면 위아래가 확 트인 24m 높이의 통층 형태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천장 중앙에는 봉황 목(木) 조각이 있어 왕의 화려한 권위를 보여줍니다. 평소 밖에서는 도저히 관람할 수 없는 천장 장식도 볼 수 있습니다. 인정전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어좌(御座·임금의 자리) 위의 봉황 부조입니다. 봉황 한 쌍이 구름 속을 날고 있는 모습이지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소나무, 파도를 그린 어좌 뒤 일월오봉도도 찬찬히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명선 창덕궁관리소장은 말합니다. “인정전은 현대 아파트로 치면 11층 높이에 해당하는 250년 된 목조 건물입니다. 샹들리에와 커튼 등 외래문물도 받아들여 조선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를 볼 수 있는 귀한 공간입니다.”
조선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창덕궁 인정전 모습. 김선미 기자
창덕궁 후원 부용지도 봄맞이가 한창입니다. 16년 만에 연못 속 나뭇잎과 뻘을 걷어내며 석축을 손보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물 빠진 부용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누군가는 “공사 중이네”라고 지나칠 수 있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16년 만에 부용지 연못 속을 보는 기회랍니다. 창덕궁관리소 관계자들과 주합루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조선의 왕은 부용정을 내려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요.
16년만에 준설 작업 중인 부용지 전경. 김선미 기자
창덕궁 주합루에서 내려다본 부용지. 16년 만에 연못을 정비하는 작업 중이라 새로운 경관을 보여준다. 김선미 기자
22일부터 28일까지는 ‘봄을 품은 낙선재’ 관람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낙선재는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 13년(1847년)에 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지어졌습니다. 낙선재 건물을 기준으로 우측에는 석복헌과 수강재, 뒤편에는 각종 화초와 화계(花階·계단식 화단)가 있는데 이를 통칭해 낙선재라고 부릅니다. 덕혜옹주 등 조선 왕실 후손들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봄을 품은 낙선재’를 통해서는 평소에는 잘 개방이 안 되는 석복헌과 수강재 일원의 봄꽃 핀 뒤뜰을 둘러보며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낙선(樂善)은 ‘선을 즐긴다’는 뜻으로 헌종의 마음이 깃든 곳입니다. 낙선재로 들어서는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신선이 사는 선계를 은유하는 것으로, 중국 설화에 등장하는 서왕모의 거처인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현재는 매화가 막 피기 시작했지만 조만간 매화가 흐드러지면 장관이 펼쳐지게 됩니다.
석복헌은 헌종이 순화궁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어준 곳입니다. 그는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 낙선재에서 함께 지냅니다. 하지만 이들의 애틋한 사랑은 이 생에서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헌종이 경빈 김씨를 맞은 후 2년 뒤에 23세의 나이로 승하했기 때문이죠. 슬하에 자식이 없어 홀로 지내던 경빈은 1907년 76세에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긴긴 세월 그리움의 강(江)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경빈 김씨의 처소였던 석복헌에서 보는 화계. 5월이 되면 모란과 작약이 탐스럽게 피어난다.
낙선재 영역은 집들이 담장으로 나뉘어 독립된 공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지만 나지막한 동산과 맞닿아 서로 드나들 수 있어 하나의 후원을 이룹니다. 뒷동산이 집을 아늑하게 감싸는 지형적 특성에 계단식 석축을 쌓아 후원으로 연결시킵니다. 석축에는 옥잠화, 앵두, 모란, 작약, 진달래, 철쭉, 조팝나무, 섬개야광나무 등이 괴석과 어우러진 화계가 조성돼 있습니다. 이 꽃담이야말로 한국 궁궐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비밀의 정원이지요. 헌종과 경빈 김씨가 낙선재에 앉아 창을 열면 액자처럼 감상할 수 있던 사랑의 정원이지요.
조만간 봄꽃이 만발할 창덕궁의 화계. 김선미 기자
낙선재 영역에는 부속 건물이 각각 자리합니다. 석복원 후원에는 ‘한가하고 조용하다’는 뜻을 지닌 ‘한정당(閒靜當)’, 수강재 후원에는 푸른 구름이라는 뜻의 ‘취운정(翠雲亭)’이 각각 있습니다. 취운정은 숙종 12년(1686년)에 세워져 ‘동궐도’에서도 그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뒤뜰에서 내려다보는 낙선재. 멀리 남산타워도 보인다. 김선미 기자
낙선재 뒤뜰 높은 언덕에는 육모 정자인 ‘상량정’이 있습니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로, 평원은 ‘먼 나라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상량정은 장수·부귀·다산을 상징하는 박쥐·복숭아·청룡·쌍학 등의 문양이 장식된 정자입니다. ‘창덕궁 달빛 축전’ 때 정자에서 대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창덕궁 달빛 축전 때 대금을 연주하는 무대로도 쓰이는 낙선재 후원 높은 언덕의 상량정. 김선미 기자
낙선재 후원은 담장으로 구분되며 둥근 만월문(滿月門)을 통해 승화루 후원과 연결됩니다. 화려하게 치장한 궁궐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단청을 생략해 단정한 아름다움을 전하는 낙선재의 봄은 특별합니다. 꽃담에 화사한 꽃이 피어나고, 좋은 의미를 품은 바람이 깃들어 소박하면서도 격조가 흐릅니다. 특히 화계의 모란과 작약, 주변의 매화가 유명합니다. 낙선재 후원 담장 서편 만월문에서 보이는 상량정과 취운정 동편 작은 문에서 보이는 창경궁 정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왕의 시선과 걸음으로 봄의 궁궐을 걸어보시죠.
동아일보가 간추린 이 계절 여행 이야기, <여행의 기분>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314964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