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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숨결과 근육을 느끼다, 아흔 조각가의 전성기

입력 | 2024-03-20 03:00:00

베니스비엔날레 초청 김윤신 작가
내달 28일까지 국제갤러리 개인전
나무 연작-회화 등 51점 선보여… 남미서 40년 활동, 이국적 색채 담겨
1세대 여성 작가 뒤늦게 조명받아… 브론즈 활용 강서경 개인전도 주목




김 작가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같은 마음으로 작업하는 ‘동서남북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마을 뒷산에 베어져 쓰러진 나무들을 세워주고 싶었던 작가는 남미에서 큰 나무를 재료로 수십 년간 조각을 했다. 뉴시스

“제 평생 이렇게 많은 기자와 만난 것이 처음이에요. 처음이면서 끝일 수도 있습니다. 90년 가까이 살며 화랑과 계약을 하고 이런 시간을 갖는 것도 처음이라 얼떨떨합니다.”

지난해 서울 관악구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던 김윤신 작가(89)의 말이다. 국내에서 조각가로 활동하다 198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남미에서 40여 년간 활동한 그는 지난해 국내 국공립미술관 첫 개인전 이후 국제갤러리, 리만머핀갤러리와 공동 전속 계약을 맺고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도 초청받았다.

베니스비엔날레를 약 한 달 앞둔 19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김윤신의 개인전이 개막했다.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 평소 즐겨 입던 항공 점퍼와 청바지 대신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타난 그는 수십 년간 가족처럼 함께해 온 제자 김란 김윤신미술관장(아르헨티나)의 도움을 받아 차분하게 작품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연작 ‘합이합일 분이분일’과 초기 작품 ‘기원 쌓기’부터 최근 제작한 회화 작품까지 51점을 선보인다. K1 전시장에서는 알가로보, 라파초, 올리브 등 다양한 나무의 속성을 활용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작가는 “나무는 말없이 서 있으니 사람이 잘 모르지만, 나무는 살아 있다”며 “나무를 좋아하면 나무가 풍기는 향, 근육의 질, 나무가 숨을 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나무와 우리는 형태만 다른 것이지 결국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점은 같다”는 말에서 생명으로서 나무에 감정을 이입하며 그 형태를 드러내려는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K2 전시장에서는 지난해 미술관 개인전에서 볼 수 없었던 회화 작품을 대거 만날 수 있다. ‘진동’, ‘내 영혼의 노래’, ‘원초적 생명력’ 등 제목의 작품들은 나이프로 물감을 긁거나 물감을 묻힌 나무 조각을 찍어내는 기법을 활용해 제작했다. 이 때문에 직선의 강렬한 에너지가 두드러지는데, 여기에 국내 작가와는 사뭇 다른 색채를 활용해 한국적이지만 이국적인 감성을 자아낸다. 작가는 멕시코 여행을 계기로 아스테카 문명에서 영감을 받거나, 파타고니아 원주민 마푸체족의 예술에서 한국의 전통 오방색과 유사한 부분을 차용했다.

김윤신 작가가 전기톱을 들고 나무 조각을 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일부 조각 작품에는 못이 박혀 있는데 이에 대해 작가는 “솔직히 말하면 내 힘으로 뽑을 수 없어 채색만 했다”며 “내 힘으로 뭔가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자연의 재료를 작가 개인의 의지대로 가공하거나 억지로 변형하기보다 그 결을 살리고자 하는 태도가 드러났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도 참석해 작가가 발언할 때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 등 애정을 드러냈다. 이 회장은 “지난해 남서울미술관 전시 소식을 언론을 통해 보았고, 1세대 여성 예술가인데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직접 전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술관을 찾아가 작가님과도 만나고 그때부터 전시를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K3관에서 선보이는 강서경의 개인전 ‘마치 MARCH’에 브론즈를 구부리고 두드린 조각 ‘산’(왼쪽)과 정간보(조선시대 세종이 창안한 국악 기보법 중 하나)의 기호를 토대로 한 ‘정’ 연작이 전시돼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같은 날 국제갤러리 K3관에서는 강서경의 개인전 ‘마치’가 개막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창안한 악보 ‘정간보’의 기호를 토대로 한 ‘정’ 연작과 회화 속에 시간을 담고자 한 회화 연작 ‘모라’ 등을 선보인다. 브론즈를 구부리고 표면을 두드려 제작한 새로운 조각 연작 ‘산’도 볼 수 있다. 두 전시는 모두 4월 28일까지.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