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칭찬의 효과를 강조하는 책들이 많다. ‘서로 칭찬합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전 국민이 칭찬하기를 연습하기도 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칭찬할 구석을 억지로라도 찾게 된다. “어머, 얼굴이 너무 좋아 보여요.”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이런 말들을 우리는 첫 인사말의 관용어처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꾸중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민족이었다. 학교뿐 아니라 집에서도 꾸중을 듣지 않으면 하루가 지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자녀를 꾸중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어머니는 머리를 조아렸고 더 혼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직장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꾸중과의 사투가 직장 생활의 핵심이었다. 꾸중은 어른의 사명이자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었고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뿌리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한국에 꾸중 대신 칭찬이 난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핵심에는 미국 문화권에 기초를 둔 긍정심리학이 있다. 꾸중을 힘들어하던 우리는 긍정심리학을 무조건 칭찬하기 혹은 무조건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해석하고 적용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꾸중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칭찬과 꾸중에 대한 태도는 동서양이 크게 다르다. 특히 미국 사람들은 칭찬을 밥 먹듯이 한다. ‘Excellent’, ‘Fantastic’, ‘Great’ 등 칭찬에 대한 단어들이 수없이 많고 상대적으로 꾸중에 관한 단어는 별로 없다. 이런 태도에는 칭찬과 꾸중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철학이 숨어 있다. 칭찬은 사람을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는 반면 꾸중은 동기를 잃게 한다고 믿는다. 이와 달리 한국인은 꾸중이 사람을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었다. 비록 성과가 좋은 경우라 하더라도 말이다.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낼 때까지 꾸중이 이어진 이유다. 칭찬은 동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칭찬으로 지금 수준에 만족하며 나태해질까 걱정했다.
이 실험은 성과를 올리려면 잘했을 때는 잘했다고 이야기하고 못했을 때는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다는 교훈을 준다. 그래야 현실을 직시하고 적절한 준비와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자명한 사실이지만 현실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일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드백은 정확하고 현실적일 때 효과가 더 좋다. 동기를 높인다는 명분으로 잘한 사람에게 못했다고 다그치거나 못한 사람에게 잘했다고 하는 건 더 낮은 성과를 초래할 뿐이다. 아쉽지만 언제부턴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바른말을 하는 데 많은 부담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진실한 꾸중일 수 있다. ‘꼰대’라는 이름으로 꾸중이 사라지는 지금이 안타깝다. 정당하지 않은 꾸중을 하자는 게 아니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꾸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실한 꾸중 없이는 성장도 발전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꾸중이 멘털을 더 강하게 하고 시련과 아픔을 헤쳐 나가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기를 내는 ‘진실한 꼰대’가 더 많아져야 한다.
※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388호(3월 1호) “‘진실한 꾸중’은 어디 갔는가” 원고를 요약한 것입니다.
정리=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