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문화부 차장
“일본이 과거를 사과하지 않는다는 기성세대의 인식을 젊은 세대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12일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이 기자간담회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박 이사장은 “50대 이상 기성세대는 살아온 길이 굉장히 험악했기 때문에 자기 연민, 한(恨)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인 영국과 아일랜드를 거론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든 걸 영국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는 것. 그는 “그런데 아일랜드가 경제 발전을 하더니 2000년대 초반 여론조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잘 통하는 나라가 영국’이라고 답할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아일랜드의 경제가 발전하고 민도(民度)가 성숙하면서 영국과 화해했듯, 10대 경제대국이 된 한국도 일본에 사과를 강요하지 말고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역사학계는 박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 이를 반박할 수 있는 학술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의 수장이 “일본에 사과를 그만 강요하자”는 식의 역사 인식을 공개적으로 밝힌 건 재단 설립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22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종군위안부’ 표현을 없애고 ‘강제징용’ 피해를 희석시키는 내용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회고록에서 “일본은 과거 몇 번이나 사과해왔다. ‘여러 차례 사과를 시켰으면 이제 됐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썼다. 일본 주류의 과거사 인식은 여전히 사과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학문의 자유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장관급 예우를 받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공적인 발언은 다르다. 사실 이번 논란은 석 달 전 뉴라이트 성향이 강한 박 이사장이 임명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앞서 박근혜 정부 때도 뉴라이트 학자가, 문재인 정부에선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을 한 진보계열 학자가 각각 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돼 ‘코드 인사’ 논란이 일었다.
미중 갈등, 북핵 위기와 맞물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한미일 3각축이 중요하다는 현 정부의 방침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 인식은 국제 정세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역사나 인권 등의 이슈에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갈릴 수 없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