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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詩 대모, 美 전미비평가상 수상

입력 | 2024-03-23 01:40:00

김혜순 시인 시집 ‘날개 환상통’
韓작가-번역시집 첫 수상 기록
젠더 차별 넘어서는 내용 담아
金 “亞 여성에게 상준 것 놀라워”




김혜순 시인(69)이 시집 ‘날개 환상통’(사진)으로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상)을 수상했다. 한국 문학 작품이 NBCC상을 받는 건 처음으로, 번역 시집이 이 상을 받은 것도 전례가 없다.

21일(현지 시간) NBCC는 미국 뉴욕 뉴스쿨에서 열린 ‘2023 NBCC상’ 시 부문 수상작으로 ‘날개 환상통’의 영어판 시집(Phantom Pain Wings)을 선정 발표했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NBCC상은 1년간 미국에서 영어로 쓰인 최고의 책을 선정해 시, 소설, 논픽션, 전기, 번역서 부문별로 수상자를 정한다.

이날 김 시인은 출판사를 통해 “전혀 수상을 기대하지 못했다. 아시아 여자에게 상을 준 것이 놀랍고 기쁘다”며 “훌륭한 번역으로 오래 함께해 온 최돈미 씨에게 감사하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에 대신 참석한 미국 출판사 뉴디렉션퍼블리싱의 제프리 편집자는 “젠더는 명사가 아닌 동사다. 이렇게 또 하나의 여성을 택해줘서 고맙다”는 김 시인의 소감을 대신 전했다.

‘날개 환상통’은 김 시인의 등단 40주년을 맞아 201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13번째 시집이다. 동명의 표제시에서 화자인 ‘나’와 ‘새’는 권력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채 함께 환상통(幻想痛)을 겪는 존재로 그려진다. 김 시인은 ‘새 하기(새가 되기)’라는 개념을 통해 젠더 차별을 넘어서는 내용을 담았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새를 주어도 목적어도 아닌 동사로 만들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무는 시적 효과를 증폭시켰다”고 말했다. ‘날개 환상통’은 한국계 미국인인 최돈미 시인(62)의 번역을 거쳐 지난해 5월 미국에서 출간돼 현지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말 이 시집을 ‘올해 최고의 시집 5권’ 중 하나로 선정했다.

김 시인은 한국 문단에서 ‘여성시의 기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입선한 뒤 1979년 계간지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로 등단해 총 14권의 시집을 내놓았다. 문단에선 여성적 특성을 수용해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에 대한 비전으로 만들어내는 김 시인의 작품 성향이 서양의 페미니즘과 다른 의미에서 독특하게 받아들여졌을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 강동호 문학평론가는 “김 시인은 여성으로서 정체성에서 인간 종의 문제로까지 작품세계를 확장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도전을 하고 있다”며 “동시대와 호흡하고 있는 시인으로서의 보편성이 국제무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논픽션이나 소설에 비해 번역이 까다로운 시 부문에서 수상작이 나온 것도 이례적이다. 김 시인은 이번 수상에 앞서 ‘죽음의 자서전’으로 2019년 캐나다의 그리핀 시문학상을 비롯한 4개의 해외 문학상을 받았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2010년대 이후 최돈미 시인 겸 번역가처럼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밝은 번역가들이 등장해 번역의 질이 높아지면서 해외 문학상 수상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