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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이재명-윤석열, 누가 더 제왕적인가

입력 | 2024-03-23 10:00:00


과연 제왕적 총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결코 박용진을 용납하지 않았다. 과거 성범죄자 변호 이력이 불거져 사퇴한 서울 강북을 조수진 후보 자리에 22일 친명(친이재명) 한민수 대변인을 전략공천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서울 강북을 의원(왼쪽)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뉴시스

조수진과 경합을 벌였던 현역 박용진 의원은 고려되지도 못했다. 당 최고위와 당무위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재명 대표가 내린 결정이다. ‘제왕적 대통령’도 국민 눈이 무서워 감히 못할 담대한 결정을 일개 정당 대표가 해낸 셈이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 시대 퇴장과 함께 제왕적 당 총재의 시대도 종말을 고한 줄 알았다. 아니었다. 비록 야당 총재라 해도 공천권과 정치자금을 틀어쥐고 국회의원들을 수족처럼 부리던 전근대적 가산주의(家産主義·patrimonialism)는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자금보다 막강한 개딸 팬덤을 무기로 공천 룰을 바꾸고, 당내 민주주의를 부정한 채 당 대표가 전권을 틀어쥐는 정당의 사당화(私黨化)는 SNS시대에도 가능하다. 이 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은 임혁백이 2014년에 쓴 저서 ‘비동시성의 동시성’ 민주당 판이다.

● 이재명의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그럼 윤석열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인가. 윤 대통령의 ‘20년 지기’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 위원장이 21일 대통령 민생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여당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24번에 배정되자 삐져선 사퇴했는데, 하루 만에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대파로 후려치듯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옆에 세운 거다.

윤석열 대통령이 3월 2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주기환 대통령 민생특별보좌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2024. 03. 21.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 전날 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친윤(친윤석열) 핵심 이철규 의원이 한동훈에게 “이재명의 민주당과 뭐갸 다르냐”고 공개 저격을 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친분 깊은 주기환을 비례대표 당선권 안에 배치해 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있다고 대놓고 밝히면서 이건 주기환이 당에 공헌했기 때문이지 사천이 아니라고 했다.

참 도긴개긴이다.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은커녕 제왕적 총재에 한참 못 미친다고 눈물을 찍어내야 할 것인가. 주기환은 “단순히 술 한 잔 하는 정도가 아니라 속내를 다 털어놓는 관계”라고 밝혔는데 그렇다면 두 분이 계속 폭탄주를 마시면서 속내를 털어놓으시기 바란다. 개인적 속내 털기에 그치지 않고 하필 총선을 코앞에 둔 이 때 대통령이 찐윤을 공직에 임명하니 ‘정권 심판론’이 솟구치는 것이다.

● 대통령 후보 ‘배우자 부실장’ 직책까지

친명이든, 친윤이든 그들의 ‘브로맨스’에 시비 걸 생각은 없다. 아무리 피보다 진한 사이라 해도 ‘관리를 공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사유물로 여기는 것’이 가산주의다(‘비동시성의 동시성’ 641쪽). 심지어 주기환의 아들도 대선캠프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이어 대통령비서실 부속실에서 6급으로 일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공직 임명권이 있어 대통령실에 자리를 만들어줬고, 이재명은 개딸 팬덤과 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빽’이 있어 공천을 준 것이 차이일 뿐이다. 만약 이재명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자리를 만들어줄지 상상초월이다.

윤 대통령 부인도 제2부속실을 안 두고 있는데(그래서 서둘러 설치하라는 판인데) 대통령 후보 시절 ‘배우자실 실장’에 ‘배우자실 부실장’까지 설치했던 이재명 아니던가(그 부실장이 이번에 사천 논란을 딛고 경선 승리한 권향엽 후보다). 아니, 대통령 후보 배우자에 대한 의전이 그 정도면, 김혜경 씨가 대통령 부인 됐으면 어쩔 뻔 했느냐고?

권향엽 더불어민주당 전남 순천-광양-곡성-구례을 후보.

정치학자 임혁백은 “21세기 한국 정치를 선진화하기 위해선 전근대적인 유교적 가산주의 전통을 청산해야 한다”고 저서에서 강조했다. 만일 그가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지 않았다면 2024년 총선으로 인해 한국 정치는 한층 후진화 됐다고 목청을 높였을지 모를 일이다. 임혁백은 이번 공천으로 가산주의의 특징인 이재명의 보스주의, 보스 중심의 인치주의를 굳혀준 것은 물론 한국 민주주의 후퇴에도 기여한 꼴이 되고 말았다.

● 이념에 따라 민주 후퇴 인식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정권 심판론은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최근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가 발표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4’에선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에서 독재화로의 전환이 진행되는 국가 중 한 곳으로 꼽았다. ‘검찰 독재 심판’에 힘을 실어주는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발간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4 중 발췌. 2015년 박근혜정부 당시 0.6이었던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상승했다가 2023년에 다시 2015년 수준으로 하락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이 연구소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선 ‘결함 있는 민주주의’라고 본 수리남, ‘하이브리드 정권’이라고 본 부탄을 자유민주주의라고 분류했다는 사실이다(두 나라를 폄훼할 뜻은 전혀 없다^^). 수리남이 민주주의 순위 45위인데 한국이 47위라고?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걸 이해하게 해주는 또 다른 연구를 발견했다. 2023년 초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민주주의 후퇴 인식 조사’를 분석한 조선대 지병근 교수의 ‘민주주의 후퇴 인식의 이념적 편향성’ 논문이다. 응답자들 절대 다수가 윤석열 정부 시기에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되 응답자의 이념이 보수적일수록 윤석열 정부보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 민주주의가 가장 많이 후퇴했다고 인식하며, 진보적일수록 이와 정반대로 인식할 가능성이 증가했다는 거다.

● 다시 대통령이 드러나고 말았다

대선 0.73% 차이가 말해주듯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 거의 양분된 나라다. 간신히 정권 교체에 성공했는데 의회권력은 제왕적 야당 총재가 꽉 잡고 있다. 그래서 보수 성향, 아니 윤석열 정부가 곱진 않지만 문 정권 뺨치는 ‘이재명의 민주당’에 계속 의회권력을 줘선 안 된다고 믿는 유권자들은 요즘 애가 탄다. 독불장군 식으로 밀어붙이는 윤 대통령을 덜 보이게 하려고 국힘은 73년생 한동훈을 내세웠다. 강감찬 아꼈다 임진왜란 때 쓸 수 없다며, 급하게 출발했지만 산뜻하게 이재명을 압도하는가 싶었는데, 기어이 대통령은 코끼리만한 덩치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번 주 갤럽 조사에서 ‘정부 견제 위해 야당 후보 당선’ 응답이 51%다. 전 주보다 늘었다. 심지어 중도층에서도 여당(26%)보다 야당(58%), 무당층도 여당(19%)보다 야당(43%) 승리를 원한다. 왠지 아는가. 총선은 대통령 지지율이 좌우한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률이 꼴랑 34%여서다. 전주보다 올라도 시원치 않은데 2%포인트가 떨어졌다.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에 반발하며 집단 휴학한 한 의대 강의실이 텅 빈 채 가운이 놓여있는 모습. 동아일보DB

윤 대통령은 긍정평가 이유 첫 번째가 의대정원 확대(27%)이고 두 번째가 결단력/추진력/뚝심(10%)인데 뭔 소리냐며 격노할 지 모른다. ‘의사들 악마화’에 더욱 매진할까 겁난다. 방향은 옳을수 있어도 2000명씩 5년간 무조건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건 국민을 불안케 한다. 대통령은 아프거나 (만에 하나 일어나선 안 될) 사고가 나도 최고의사가 달라붙겠지만 보통사람은 다르다. 혹시나 병원 갈일 생길까 걱정이 태산이다.

● 이재명에게 정부 견제 맡길 수 있나

더 늦기 전에 한동훈은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말 뒤집기를 밥먹듯 하는 이재명의 민주당에 정부 견제를 맡길 수 없다며, 국정운영에 책임 있는 집권여당으로서 ‘균형과 견제’ 역할을 다하겠다고 분명히 밝혀야 할 때다.

선거 유세만 할 게 아니다. 의대정원 확대 발표 이후의 의료개혁 문제에 대해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정책도 내놓아야 한다.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는 대통령실에도 똑바로 하라고 말하기 바란다. 국힘 승리를 위해서라면, 국정기조 전환이나 대통령 탈당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정권 심판론이 바람을 타는 것은, 여전히 윤 대통령은 국민 앞에 오만한데 대통령 앞에서 유일하게 ‘깡다구’를 보인 한동훈이 총선 뒤 국힘에서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아서다. 권력이란, 남자의 질투란 무서운 법이다. ‘총선 후 유학설’에 대해 그는 22일 “저는 뭘 배울 것이 아니라 무조건 봉사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지만 국힘을 지키겠다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발 윤 대통령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달라고, 비례대표 정당으로 범죄(혐의)자 그득한 조국혁신당을 찍겠다는 응답이 무려 15%나 나오는 것이다.

● 한동훈이 나라를 이끌 비전을 말하라

윤 대통령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관섭 대통령비서실장은 1월 1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공천은 당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대통령실은 공천에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말했지만, 아니었다(대통령실 아닌 이철규가 공천에 개입했다). 한동훈이 ‘지르면’ 대통령은 지는 척 받아주고 갈등을 봉합하는 모습을 연출했으나 그 담엔 그대로다. 한동훈이 어렵게 입을 뗀 대통령 부인의 명품백 사건 이후 제2부속실도, 특별감찰관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종섭 호주 대사가 조기 귀국했다고 ‘대통령실 수사 외압 사건’ 의혹이 사라질리 만무하다.

이재명의 ‘망나니’ 노릇을 하는 바람에 학자로서의 명예가 많이 훼손됐지만 임혁백은 저서에서 강조했었다. “한국 정당의 제도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정당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 과정의 꼭대기에 있는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제도적 통로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통령도 자신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집권 여당과 상의해야 한다”고. 그래야 집권여당의 권위와 권력도 올라가고, 대통령도 여당과 통합적으로 움직여 성공적 국정운영을 할 수 있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과도한 당정분리로 열린우리당은 선거에서 연패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찰떡같은 당정 원팀으로 총선에선 대승했으나 정권을 잃었다. 제왕적 당 대표와 대통령, 어느 쪽이 더 민주주의를, 나라를 말아먹는지는 각자의 이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동아일보DB

다만 책임 있는 여당 대표로서, 그리고 낡아빠진 가산주의를 뿌리뽑고 정치의 세대교체를 해낼 수 있는 73년생 정치인으로서 한동훈은 비전을 밝혀야 한다. 총선에 이길 경우 나라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통령한테 실망한 유권자가 이재명 아닌, 조국 아닌, 한동훈에게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