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
이를 주애에게 썼다는 것은 김정은이 11세 딸을 차기 지도자로 확실히 밀고 있다는 증거다. 2022년 11월 아버지 손을 잡고 나타난 주애의 첫 호칭은 ‘사랑하는 자제분’이었다. 이후 ‘존귀하신’ ‘존경하는’ ‘조선의 샛별여장군’ 등으로 점점 높여졌고, 1년 반도 안 돼 급기야 향도자 반열에 올려졌다. 김정은 대신 주애를 부각시킨 사진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김정은은 정말 그를 차기 여왕으로 키울 생각일까. 여러 의견이 엇갈리겠지만, 누가 되든 나중에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여도 별문제는 없다.
김정은이 “언제든 죽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면 “내가 죽은 뒤 가문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가장 큰 걱정일 것이다. 후계자 없이 김정은이 급사하면 혼란이 벌어지고, 김 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 후계자를 내세우고 권위를 높여 만일을 대비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북한에서 5대까지 내려가면 성씨가 바뀔 위험을 감수하고 여왕을 내세울 수 있을까.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도 없던 일이다. 김정은은 원하면 언제든 아들을 얻을 수 있다. 이미 지금도 여럿 있다. 어쩌면 그 아들들이 너무 어려 클 때까지 주애를 ‘비상용’ 후계자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주애가 후계자가 절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김정은의 생각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다만 몇 가지 사전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김정은이 딸을 너무 사랑한다면 후계자로 삼을 수 있다. 김정은은 권력을 위협하는 형 김정남을 세계의 면전에서 잔혹하게 독살했다. 이모부 장성택도 비참하게 끌려가는 장면을 연출하며 처형했다. 그것은 김정은의 뜻일 수도 있고, 김경희 등 패밀리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혈육을 죽인 김정은의 마음이 편했을 리는 없다.
김정은이 딸을 너무 사랑한다면 이런 위험을 감수하게 하진 않을 것이다. 다른 후계자로 교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손으로 딸을 죽이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애에게 권력을 넘기거나, 가장 아끼는 자식임을 과시함으로써 함부로 주애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둘째 이유도 김정은의 체험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2010년 10월 새파랗게 젊은 25세의 김정은이 처음 나타나자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김정은의 경력이나 능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어린애가 알면 뭘 알겠냐”고 수군거렸다. 김정은도 여러 차례 참을 수 없는 수모를 경험했을지 모른다. 집권 초기 자기를 무시했다고 죽인 사람도 많다. 그것이 한에 맺혀 “내 후계자는 불쑥 튀어나오게 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통치자임을 인식시키겠다”고 다짐했을 수 있다.
셋째 이유는 해외 물을 먹은 김정은이 5대 세습은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다. 인공지능을 앞세운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20∼30년 뒤를 내다볼 수 있는 전문가도 없다. 나이를 감안하면 주애는 최소 반세기 이상의 기간 동안 통치할 수 있다.
지금의 북한처럼 사회주의를 사칭한 기형적인 왕조는 그리 오래갈 수는 없다. 이미 북한 주민의 마음은 김씨 왕조를 떠났다. 다만 극단적 공포통치로 현재 상황을 유지할 뿐이다. 경제적 비전도 밝지 않다. 김정은은 주애에게 자신이 죽을 때까지만 통치하고 이후엔 북한을 정상국가로 되돌리는 부드러운 인계자 역할을 기대하고 있진 않을까. 물론 이는 희망적인 시나리오일 뿐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