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돌이켜보면 7년간 이 동네에서 우리 애들 키운 건 3할이 어린이집, 3할이 우리 부부, 또 3할은 ○○○소아청소년과 선생님이네.”
얼마 전 이사를 준비하다 아내에게 한 말이다. 아이 이마가 펄펄 끓을 때, 기침이 자지러질 때마다 단골 소아과에 달려가곤 했다. 원장은 다리에 깁스를 한 날도 출근해 진료를 했다.
이사 후 보름이 지난 20일 내년도 의대 대학별 정원이 발표됐다. 일각에선 “수능 2등급도 의대에 입학할 판”이라며 호들갑이다. 2등급이면 수능 상위 5∼11%다. 서울 주요 상위권 이공계에 갈 성적이다. 의대 교수와 의대생들은 “수업이나 잘 따라올지 모르겠다”며 혀를 찬다.
그러면 좋은 의사와 수능 1등급은 상관관계가 있을까. 의대 공부의 특징은 암기량이다. 뼈, 혈관은 물론이고 회충 학명까지 달달 외운다. 환자 앞에서 지식이 기계처럼 튀어나와야 한다. 반면 이공계는 암기할 정보는 의대보다 적지만 미지의 답을 머리로 찾아 나아가야 한다. 양자와 우주, 수(數)의 세계에서 수많은 가설을 세웠다 허무는 고도의 창의력과 사고력이 필요하다.
어느 공부가 더 어렵냐고 묻는 것은 우문(愚問)이다.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 알파고를 이긴 바둑기사 이세돌, 서울대 의대 수석 졸업생을 동일선상에 놓을 순 없다. 분야가 다르니 필요한 지적 능력도 다를 뿐이다. 그런데 현실은 사고력이 뛰어나든, 암기를 잘하든 모두 의대가 빨아들인다. 의대에 가려면 수능 미적분이나 기하 점수가 높아야 하는데 정작 의대 공부에는 이 과목들이 별 쓸모가 없다.
대학은 굳이 이런 모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수능 만점자가 우리 의대에 왔다’ ‘우리 의대 커트라인이 높다’는 타이틀을 포기하기 싫어서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제주대가 내놓은 ‘무(無) 수능 선발’ 구상은 주목할 만하다. 수능 등급이 아니라 정말 의사의 인성과 자질을 갖춘, 지역 의료를 지탱할 학생을 뽑겠다는 결단이다. 서울의 유명 대학들도 못 한 결정이다.
2020년 의료 파업 당시 논란이 된 의사단체 홍보물이 하나 있었다.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할 진단을 받을 때 ‘전교 1등 출신 의사’와 ‘성적 낮은 공공의대 의사’ 중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내용이었다. 지금 되묻는다. 사직서를 던지고 병원을 뛰쳐나간 의사와 동료의 비난을 참으며 병동을 지키는 의사 중 국민들은 누구에게 몸을 맡기겠나.
우리 딸들이 아플 때 돌봐줬던 그 의사가 어느 의대를 나왔는지, 수능 몇 등급이었는지는 모른다. 사실 관심도 없다. 그 대신 수많은 소아청소년과가 문을 닫는 와중에 변함없이 홍제동 상가 5층 진료실을 지키며 아이들을 돌봐줬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는다. 환자에겐 그런 의사가 최고의 의사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