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과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100년 | 1924-2024’
화장품 원료가 되는 식물들로 이뤄진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전경. 아모레퍼시픽 제공
연분홍색 서향(瑞香)이 피어나 미니 온실을 그윽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봄의 전령사인 노란색 풍년화와 수선화도 피었다. 조만간 목련과 작약도 만발할 것이다. 이곳은 경기 오산시 가장산업단지 아모레 뷰티파크 안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이다.
노란색 수선화가 봄을 알리는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름다움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식물원을 둘러보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아모레퍼시픽의 믿음을 체감하게 된다. 올해는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인 서성환 선대회장(1924~2003)의 탄생 100주년이다. 팩토리(공장), 원료식물원, 아카이브로 구성된 아모레 뷰티파크는 예약자 대상으로 투어를 진행하는데 연말까지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100년 | 1924-2024’라는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설화수’ ‘마몽드’ ‘이니스프리’ 등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화장품을 만드는 아모레퍼시픽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올해 연말까지 열리는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100년 | 1924-2024’ 전시 포스터.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 뷰티파크는 팩토리 앞 야외에 설치된 높이 5m 폭 9m의 파란색 대형 조각상이 가장 먼저 강렬한 인상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 자비에 베이앙의 ‘스케이터’(2014년)라는 작품이다.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질주하는 쇼트트랙 선수의 역동감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프랑스 현대 미술가 자비에 베이앙의 ‘스케이터’ 작품이 설치된 아모레 뷰티파크 전경. 아모레퍼시픽 제공
서성환 선대회장은 프랑스를 사랑한 기업인이었다. 그가 1960년 첫 프랑스 방문길에 들렀던 남프랑스 그라스의 라벤다 밭에서 받은 감동이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세계적 향수 산지인 그라스에서 식물이 경제, 나아가 문화와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 식물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식물을 활용한 화장품을 생산하고 수목원과 녹차 밭 조성을 향한 꿈을 키웠다.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선대 회장의 1950년대 모습.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 팩토리 투어는 팩토리, 원료식물원, 아카이브 순서로 진행된다. 1층 팩토리 스테이션에는 화장품 제조·포장 공정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는 미디어 월이 있다. 2층 팩토리 아카이브에서는 1945년 ‘태평양화학공업사’ 설립 초기부터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3층 팩토리 워크에서는 다양한 제조·생산 과정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아모레퍼시픽 팩토리 전경. 아모레퍼시픽 제공
●식물로 역사를 말하다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은 18개의 주제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 회사 화장품 원료로 사용되는 1640여 종의 식물을 만나볼 수 있다. 식물원 입구 마당에는 150년 된 향나무가 있다. 서 선대회장이 특별히 아끼던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다.
서 선대회장이 아끼던 150년 된 향나무. 오산=김선미 기자
다음은 이 회사를 대표하는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있는 시원(始園). 아모레퍼시픽은 서 선대회장의 어머니인 고 윤독정 여사가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던 개성의 ‘창성 상점’을 모태로 한 기업이다. 차 나무도 이 기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 선대회장이 제주의 척박한 땅을 사들여 녹차 밭으로 일궈낸 것은 ‘한강의 기적’에 버금가는 기업인의 집념이었다.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전경. 아모레퍼시픽 제공
기능성 식물 정원을 거치면 장미원이 나온다. 아모레퍼시픽의 최초 브랜드 화장품인 ‘메로디 크림’(1948년)의 상표 중앙에 바로 장미가 있었다. 라벤다원은 서 선대회장이 감명받았던 그라스의 라벤다 밭을 구현한 정원이다. 샤넬의 ‘넘버 5’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자도르(J’ador)’ 등 세계의 유명 향수들이 그라스에서 탄생했다.
아모레퍼시픽 장미원. 아모레퍼시픽 제공
그라스는 장미와 제라늄 등 원료 식물들이 재배되고 그 식물을 가공하는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향료 산업을 꽃피울 수 있었다. 서 선대회장은 그라스 방문을 계기로 식물에 관심을 키워 우리 식물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시켰다. 세계 최초의 인삼 화장품인 ‘ABC 인삼 크림’(1966년)을 만들고, 1997년에는 한방화장품 ‘설화수’를 내놓았다.
아모레퍼시픽 ABC 크림.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은 곳곳이 비밀의 정원이다. 침엽수원에 들어서 오솔길에서 만나는 편백나무와 구상나무는 제주의 곶자왈에 온 느낌을 준다. 암석원도 지형과 식재가 제주 오설록 티하우스 뒤편의 경사지와 흡사하다. 삼지구엽초, 눈개쑥부쟁이, 깽깽이풀…. 작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진 우리 풀들이 땅을 포근하게 덮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암석원의 작은 풀들. 오산=김선미 기자
정원 조경은 정영선 조경설계 서안 대표와 박승진 디자인스튜디오 로사이 대표가 맡았다.
“1970년대 초 독일에 가든 쇼를 보러 갔는데, 온통 우리나라 꽃 천지였다. 정작 국내에서는 꽃 취급도 안 하는 꽃들이 어엿하게 ‘코리아’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우리 꽃이 중요한지 모르고 외국 꽃만 찾던 게 민망했다. 식물을 향한 진정성을 바탕으로 앞으로 아모레퍼시픽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좋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정영선 대표)
아모레퍼시픽 암석원.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은 과거 수원 사업장에서 이식해 온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들로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는 공간이다. 화장품에 사용되는 원료 식물 중에서 뽕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등 키 큰 교목을 비롯해 산수유와 매화나무 같은 과수들, 구기자와 닥나무 등 키 작은 관목들을 섞어 심었다.” (박승진 대표)
아모레퍼시픽 ‘마몽드 가든’.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의 비밀의 정원은 맨 마지막에 있다. 정원 갤러리다. 유리 통창을 통해 멀게는 자작나무 숲, 가까이로는 연못이 펼쳐진다. 연못에 연밥이 떠다니는 풍경이 꼭 오리가 헤엄치는 모습 같다. 여름에는 이 연못이 연꽃으로 가득 찬다.
아모레퍼시픽 정원 갤러리.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의 정원들에는 늘 물이 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건축을 맡은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5층의 야외 정원에도, 제주 오설록 티 뮤지엄인 티스톤 옆에도 네모난 연못에 물이 찰랑거린다. 아모레퍼시픽, 그전의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사명(社名)에도 가장 큰 바다(태평양)라는 물이 들어있다. 부드럽고 푸른 물의 이미지를 좋아했던 창업자의 꿈은 그렇게 정원에 구현돼 있다.
아모레퍼시픽 정원 갤러리에서 바라보는 연못 풍경. 오산=김선미 기자
●아카이브 전시의 정석
1980년부터 기업 사료 수집을 시작한 아모레퍼시픽은 2015년 오산 아모레 뷰티파크 내에 아카이브 독립 건물을 신축했다. 아모레퍼시픽이 그동안 생산한 화장품을 비롯해 기계 설비, 광고물, 직원 유니폼 등 8만여 건의 기업 자료가 소장돼 있다. 기업 활동의 결과물인 아카이브의 다양한 소장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형 수장고도 운영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아카이브 전시장 내부. 아모레퍼시픽 제공
이번 기획 전시에서는 1955년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신문광고를 시작해 ‘산소같은 여자’ 등 여러 화제작을 남긴 광고 포스터들, 1964년 새로운 화장품 유통경로로 선보인 방문판매 제도 관련 사진들, 서 선대회장의 집무실을 재현한 공간, 전·현직 아모레퍼시픽 임직원의 증언을 담은 기업 영상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자연의 이치와 식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첨단 기술을 접목해 소비자와 문화적으로 소통하는 기업의 노력을 담아냈다. 가히 아카이브 전시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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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