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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명 숨진 러 테러, 우크라에 화살 돌린 푸틴

입력 | 2024-03-25 00:50:00

모스크바 공연장 무장괴한 난입
총격-방화에 부상자도 150여명
IS-K “우리가 공격” 美도 “IS 소행”
푸틴, 우크라 공세강화 명분 삼을듯




모스크바 공연장서 무차별 총격뒤 방화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불까지 질러 더 큰 피해로 이어졌다. 사진 출처 모스크바=신화 뉴시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크렘린궁(대통령실)에서 불과 20km 떨어진 ‘크로쿠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22일(현지 시간) 무차별 총격 테러가 벌어져 최소 137명이 숨졌다. 이슬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분파인 ‘IS-K’(호라산)는 테러 직후 배후를 자처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별다른 정황 공개 없이 “테러범들이 우크라이나 쪽으로 도주하려 했다”면서 ‘우크라이나 배후설’을 주장했다.

금요일이던 이날 오후 7시 40분경 콘서트 관람을 위해 공연장을 찾은 러시아 시민들은 무장 괴한의 자동소총 무차별 난사와 방화 등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24일 오후 6시(한국 시간 25일 0시) 기준 최소 137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다쳤다. 2004년 314명의 목숨을 앗아간 체첸 반군의 베슬란 학교 인질 사건 이후 20년 만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최악의 테러다.

모스크바 공연장서 무차별 총격뒤 방화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북서부 ‘크로쿠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무장괴한들의 무차별 총격과 방화로 최소 137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이 총기를 난사해 공연장 곳곳에 민간인 관객이 쓰러져 있다. 사진 출처 X 캡처


IS-K는 테러 직후 IS와 연계된 뉴스매체 ‘아마끄’를 통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도 “IS-K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하루 뒤인 23일 핵심 용의자 4명을 포함해 총 11명을 검거한 뒤 우크라이나와의 연계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러시아 당국이 구성한 사건 조사위원회는 “핵심 용의자 4명이 모두 브랸스크에서 검거됐다”고 설명했다. 브랸스크는 모스크바와 300km, 우크라이나와 약 100km 거리에 있다. 푸틴 대통령도 23일 대국민 연설에서 “초기 정보에 따르면 (테러범들이) 우크라이나 쪽에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 있었다고 한다”라고 주장했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즉각 “우크라이나의 개입은 전혀 없었다”고 반박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푸틴을 비롯한 쓰레기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고만 한다”면서 “그들은 늘 같은 수법을 쓴다”고 반발했다.

백악관은 또 “3월 초 미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계획된 테러 공격에 대한 정보를 러시아에 공유했다”고도 밝혔다. 푸틴 대통령이 이번 테러의 책임을 우크라이나로 몰아가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 강화 명분으로 삼으려는 속내를 드러내자 첩보 공개를 통해 러시아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6200명 공연장 출구 잠근채 총격… 엎드려 죽은 척해”


크렘린궁서 20km, 러 심장부 테러… “총소리를 콘서트 시작으로 착각도”
총기 난사뒤 커튼-좌석 불질러… 화장실-계단 등서 시신 수십구 발견
러 “용의자 4명 등 관련자 11명 체포”… “730만원에 사주 받아” 주장 공개도


“테러범이 우리를 발견했고, 그중 한 명이 달려와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할 수밖에 없었어요.”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북서부 ‘크로쿠스 시티홀’ 공연장을 덮친 총격 테러에서 살아남은 한 10대 소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몸서리를 쳤다. 무차별 총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테러범들이 총기 난사 뒤 공연장에 지른 불에 화상을 입었다. 그는 왼쪽 얼굴과 왼팔을 거즈로 감싼 채 병원에 누워 23일 러시아 관영 언론 ‘RT’에 “내 옆에 있던 여자아이는 끝내 죽은 것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 테러는 러시아 대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사실상 종신집권의 길을 연 지 닷새 만에 러시아 대통령실인 크렘린궁에서 불과 20km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2004년 체첸 반군과 러시아군의 충돌로 314명이 숨진 베슬란 학교 인질 사건 이후 러시아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로 꼽힌다. ‘현대판 차르(제정 러시아 황제)’라는 말이 나올 만큼 ‘강한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해 온 푸틴 대통령에게는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관객 향해 총기 난사, 떠나며 방화

무차별 발포에 관객들 대피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북서부 ‘크로쿠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무장 괴한들의 총격 소리를 들은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피하고 있다. 사진 출처 X 캡처


이날 밤 이 공연장에는 1978년부터 활동한 러시아의 유명 록밴드 피크닉의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6200석이 모두 매진될 만큼 인기 있는 콘서트였다. 하지만 무장괴한들이 정문에서부터 자동소총을 무차별 난사하면서 공연장 안팎은 ‘생지옥’이 됐다. 테러범들은 출구를 잠근 채 총기를 난사하고 공연장 안에 불을 질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목격자들은 오후 7시 40분경 위장복을 입은 테러범들이 미니밴에서 공연장 앞에 내렸다고 전했다. 테러범들은 자동소총, 권총, 칼, 화염병 등으로 무장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공연장 유리문 안쪽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고, 길 건너에 있는 사람들까지 표적으로 삼았다. 수십 명이 총격에 쓰러지자 이들은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공연장 안 관객들은 총소리를 콘서트 시작이라고 착각해 처음에는 대피하지 않았다. 일부 관객은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다 참변을 당했다. 엘레나 씨(61)는 “사람들이 무대 뒤쪽으로 몰려들자 테러범 중 한 명이 길을 막았다”며 “그러자 관객 중 한 명이 테러범의 총을 빼앗아 개머리판으로 그를 기절시켜 수십 명이 탈출할 수 있었다”고 RT에 전했다. 다만 “그는 살아남지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테러범들은 공연장 커튼과 좌석 등에 인화성 액체를 뿌리고 불을 지른 뒤 도주했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화장실과 비상계단 등 관객들이 총격과 화재를 피하기 위해 숨었던 곳에서 시신 수십 구가 발견됐다.

● 푸틴 “배후 처벌할 것” 예고했지만…


도주 용의자 체포 무차별 발포 뒤 공연장에 불까지 지르고 도주한 용의자들은 23일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브랸스크 지역 등에서 체포됐다. 사진 출처 X 캡처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핵심 용의자 4명 등 관련자 11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특히 핵심 용의자들은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300㎞ 떨어진 브랸스크에서 붙잡혔다. 이들의 차량에서는 권총과 돌격소총 탄창, 타지키스탄 여권 등이 발견됐다. 테러 용의자 대다수가 사주를 받은 타지키스탄 출신 외국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르가리타 시모냔 RT 편집장이 공개한 용의자 신문 영상에 따르면 용의자 중 한 명인 샴수트딘 파리둔(26)은 약 한 달 전 신원 미상의 ‘전도사(preacher)’로부터 텔레그램으로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파리둔은 “범행 대가로 50만 루블(약 730만 원)을 약속받았고, ‘나중에 100만 루블을 주겠다’고 재차 들었다”라고 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내부 피로감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20년 만의 최악의 테러 참사가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푸틴 대통령이 “테러 배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내 처벌하겠다”고 예고한 대로 ‘응징의 유혹’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카드를 꺼낼 수 있을지 딜레마라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아시아는 서방 제재에 직면한 러시아의 ‘뒷문’이어서 강경 대응을 하기는 부담이라는 것이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