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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성경과 아들의 소설책[영감 한 스푼]

입력 | 2024-03-25 23:33:00

고흐의 ‘성경이 있는 정물’



빈센트 반 고흐의 ‘성경이 있는 정물’(1885년). 같은 해 3월 고흐의 아버지는 산책하고 집으로 오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고흐의 직접적 언급은 편지에 남아 있지 않다. 장례식 때 테오가 함께 있었기에 편지를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흐는 테오가 파리로 돌아간 후 편지에서 “삶은 누구에게나 짧은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민 문화부 기자


노랗게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해바라기와 귀를 자르는 기행, 그리고 평생 한 점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던 비운의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를 생각할 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고흐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를 이렇게 오랜 시간 사랑받게 하는 것은 광기와 좌절 같은 극적인 스토리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고흐가 그린 정물화 두 점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두 정물은 유명한 해바라기도, 아름다운 꽃도 아닌 바로 책을 그린 작품입니다. 하나는 고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린 ‘성경이 있는 정물’(1885년), 또 하나는 ‘프랑스 소설책 더미’(1887년)입니다.


묵직한 성경책과 노란 소설책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흐의 작품을 소장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그의 대표작들이 걸린 전시장에서 ‘성경이 있는 정물’을 만났습니다. 두꺼운 책이 테이블 한가운데에 사다리꼴 모양으로 펼쳐져 묵직한 무게감을 뽐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 책 오른쪽 아래를 가벼운 노란 책이 경쾌하게 받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끕니다.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색빛 배경 위에 가죽 장정을 한 성경책이 펼쳐져 있고, 레몬빛 노란색이 들어간 정물화를 보낸다. 이 그림은 하루 만에, 단숨에 완성한 거야.”

편지 내용을 보면 고흐는 어두운 배경, 펼쳐진 성경책의 흰색, 그리고 작은 책의 노란빛까지 색채의 조합에 집중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림 속 책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보면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펼쳐진 책은 이 그림이 완성되기 직전 세상을 떠난 고흐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 성경책입니다. 아버지가 동생 테오에게 주라고 했던 책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 책보다 작지만 색채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책은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입니다. 고흐가 즐겨 읽었던 책입니다. 성경책 옆에는 촛불 꺼진 촛대가 그려져 있어 마치 죽음과 삶을 대비시키는 것 같습니다. 고흐는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요?


“아버지는 이 시대를 이해 못 한다”


고흐는 집을 떠났다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이 무렵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이때 불편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갖춰진 집보다 저 먼 습지에 있는 것이 덜 외로울 것 같다”거나 “아버지는 나의 자유를 향한 갈망, 벌거벗은 진실을 향한 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괴로움을 토로했죠.

여기서 고흐가 언급한 ‘벌거벗은 진실을 향한 갈망’은 그가 그린 또 다른 정물 ‘프랑스 소설책 더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정물화에는 졸라, 기 드 모파상 등 당대 지식인들이 즐겨 읽었던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색채가 아주 밝고 경쾌한 톤으로 표현된 것이 인상 깊죠. 고흐는 이 프랑스 문학가들이 “우리가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진실하게 그린다”고 칭찬했습니다.

즉, 성경책과 졸라 소설의 대비는 종교와 관념이 지배했던 과거의 사상과 개개인이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정하는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사였던 고흐의 아버지는 졸라를 비롯한 당대 문학이 신을 부정한다고 생각해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흐는 “아버지가 이 시대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며 답답하게 여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불 꺼진 촛대 옆 성경은 저물어가는 시대를, 레몬빛 작은 ‘삶의 기쁨’은 밝아오는 새 시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고전이 열어주는 마음의 세계


그렇다고 고흐가 이 그림에서 성경이나 아버지를 부정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엑스레이로 그림을 보면 성경책을 더 반듯한 사각형으로 고쳐 그린 흔적이 나타나는데, 이는 성경을 더 크고 비중 있게 그리려고 했던 의도입니다. 또 펼쳐진 구절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과 수난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이사야 53장’으로 고흐가 평소 좋아했던 구절입니다.

오히려 그림에서는 ‘벌거벗은 진실’을 갈망한다는 말처럼, 과거든 현재든 자신이 마주한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으려고 했던 태도가 보입니다. 고흐는 성경 속 구절을 실천하려 선교사 시절 교회에서 내준 집을 노숙자에게 주었다가 쫓겨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에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기를 읽고 감동받아 시골 농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죠.

또 고흐가 평생 쓴 편지에는 저자 150명, 책 800여 권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많은 책을 읽고 가까운 이들에게 추천했고, 말년 정신적 괴로움에 시달릴 때도 ‘엉클 톰스 캐빈’과 찰스 디킨스를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프랑스 문학뿐 아니라 토머스 칼라일의 철학서, 셰익스피어와 디킨스의 문학도 즐겨 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고흐는 “책과 현실과 예술은 나에게 모두 같은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사회와 타협을 거부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그를 버티게 해준 한 가지는 바로 세상을 깊고 넓은 눈으로 담은 고전 문학임을, 두 그림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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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