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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는 열등감을 먹고 산다[이정향의 오후 3시]

입력 | 2024-03-26 23:24:00

<81> 데니스 간젤 ‘디 벨레’




이정향 영화감독

독일의 고등학교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치고자 무정부주의와 독재정치 강의를 시작한다. 학생들은 하나를 골라 일주일 동안 듣는다. 첫날, 자유분방한 학생들은 독재정치를 맡은 라이너 선생에게 나치의 극악함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고, 독일에서 전체주의가 또 자행될 일은 결코 없다며 심드렁하게 군다.

라이너는 학생들끼리 마주 보던 책상 배열을 교사인 자신만을 바라보게 바꾼다. 이제부터 모든 발언은 라이너가 허락해야 가능하다. 결속력을 다지자며 구령에 맞춰 발을 구르게 한다. 아래층에서 무정부주의 수업 중이니 우리의 힘을 과시하자고 독려하자 학생들은 더 세게 발을 굴러 아래층 수업을 방해한다. 다들 우월감과 뿌듯함으로 얼굴이 빛난다. 학생들은 자기네들의 이름을 ‘디 벨레(파도)’라고 짓고, 로고도 만든다. 디 벨레의 일원임을 증명하고자 제복처럼 흰 셔츠만 입고, 자기들만의 인사법도 만든다. 점점 그들이 혐오하던 획일화가 된다. 도시 곳곳을 로고 스티커로 도배질하며 기물을 파손하고, 디 벨레에 가입 안 한 친구들을 배신자나 적으로 몰아세운다. 체육관조차 흰 셔츠를 입지 않으면 입장을 못 하게 막으면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디 벨레 안에서는 성적이나 외모, 성격에 따른 차별이 없다. 평소에 무시당했던 학생일수록 디 벨레가 주는 소속감에 맛 들려 이 작은 집단을 온 세상으로 착각하고 집착한다. 존재감 없던 시절로 돌아가기가 두렵기에 디 벨레에 맹목적으로 헌신하고, 밖에서는 디 벨레라는 완장을 무기 삼아 거침없이 군다. 마지막 수업 날, 라이너 선생이 말한다.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행한 것들이 바로 전체주의고 독재라고. 학생들은 망연자실한다.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벤 로스가 행한 실험과 그것을 기술한 책 ‘파도’가 원작이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국민이 전체주의에 빠지는 이유가 열등감 때문이라고 했다. 전체 속의 하나가 됨으로써 보잘것없던 존재가 조직의 힘에 편승해 우월감과 힘을 갖게 되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자신이 동참하는 일이 부정한지, 반대파를 비방하는 자신의 말이 거짓인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이 조직이 탄탄하게 유지돼서 초라한 자신을 감싸주는 갑옷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독일인들이 동조한 건,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독일이 열등감과 무력감에 빠졌을 때 히틀러가 국민의 분노를 한곳으로 쏟아낼 과녁을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집단광기는 그 집단 안에서는 광기인지 모른다. 자기네만이 선이고 진리이고 정의다.

※여전히 부족한 글로 마치게 되어 송구합니다. 제 깜냥에 부치는 일이었지만 독자 여러분 덕분에 뜻깊은 4년 반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이정향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