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국고보조금이 뭐길래
《2012년 대선 직후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대선 후보는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그가 투표일을 사흘 남겨 놓고 갑자기 사퇴하면서 선거보조금 27억여 원을 한 푼도 반납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져갔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지만 ‘먹튀’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을 만들고, ‘의원 꿔주기’ 꼼수로 각각 28억여 원의 선거보조금을 배분받아 비판의 대상이 됐다.》
● ‘개점휴업’인데 4년간 40억 원 넘게 지원
선거 때마다 세금으로 지원하는 돈, 선거보조금이다. 중앙선관위는 4·10총선을 위한 선거보조금 501억9700만 원을 25일 각 당에 배분했다.
기후민생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1명씩 후보를 냈다. 그런데 서울 영등포을 지역구에 출마한 김정기 전 민생당 대표의 주소지는 경기 부천이다. 출마한 지역구로 주소지도 옮기지 않은 것이다. “선거보조금을 받기 위해 후보를 낸 것”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 전 대표에게 공약 등 출마의 변을 들으려 했으나 민생당 사무처는 “연락처를 주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민생당은 2022년 지방선거 때도 단 1명의 후보를 내고 9억3000만 원의 선거보조금을 받아갔다. 당시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A 씨가 받은 최종 득표 수는 386표.
A 씨는 통화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출마였다”고 했다. 당의 선거지원금 수령도 염두에 둔 출마였다는 점을 내비친 것. 그는 “유세차량이 있어야 하고 싶은 말을 유권자에게 충분히 할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을 전혀 못 했다”며 “사비로 2500만 원 가까이 썼다”고 했다.
그럼 민생당이 받은 9억3000만 원의 선거보조금은 어디로 간 걸까. A 씨는 선거가 끝난 뒤 당으로부터 1500만 원을 받았다고 했다. 나머지 선거보조금의 용처에 대해서는 “당이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라며 “모른다”고 말했다. 복수의 민생당 관계자들도 통화에서 “답변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말을 반복했다.
●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는 정당보조금
민생당의 계속된 국고보조금 수령은 제도상의 허점과 감시의 허술함이 동시에 드러난 극단적 사례지만, 기존 원내 정당의 국고보조금 사용 역시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은 2013년 국고보조금 6668만 원을 당직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급한 것으로 회계 처리를 했다. 그리고 이를 차명계좌로 반환받아 불법 선거 자금으로 썼다가 적발됐다.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 역시 2012년 정책개발비로 6500만 원을 썼다고 회계 신고를 했는데, 몇 건의 짜깁기한 보고서가 전부였던 것으로 드러나 선관위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국고보조금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 선관위 역할이다. 하지만 막대한 규모의 보조금 집행을 치밀하게 감시하기는 쉽지 않다. 동아일보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선관위가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간 검찰이나 경찰에 고발이나 수사의뢰를 한 경우는 6건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선관위는 위법 사항을 발견하고 조치를 취한 뒤에도 그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나마 당내 갈등 끝에 한 번씩 외부로 비위 사실이 알려지는 정도다. 유권자의 감시의 눈에서 벗어난 이런 ‘깜깜이 회계 감사’는 드러나지 않은 보조금의 유용이나 위법 행위가 더 심각할 수 있다는 의심을 키우고 있다.
● 1980년 국보위가 도입한 정당보조금
당시 헌법 제7조 제3항엔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정당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다”라고 명시됐다. 이에 따라 그해 12월 정치자금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보조금 관련 조항이 신설됐다.
당시 속기록에 나타난 개정안에 대한 제안 설명이다.
“보조금의 지급 대상과 배분 비율 등을 건전한 정당의 보호 육성이라는 차원에서 새로 정하고…정치자금을 양성화함으로써 정치활동의 공명화를 촉진하고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우리 정당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에 의존해 운영돼 왔고, 그렇다 보니 정치 자금을 둘러싼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검은돈의 정치권 유통과 정당 정치의 보호를 위해 정당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보조’하기 위해 정당 국고보조금이 도입됐지만, 수차례의 법 개정을 거쳐 규모가 막대해진 정당 보조금은 이제 각 당의 주요 수입원으로 변질된 것이 사실이다. 민생당 같은 ‘개점휴업’ 정당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정부는 정치자금법상 선거보조금과 별개로,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 비용도 보전해주고 있다. 선거 비용을 국가가 부담해 비용을 줄이고 공명선거를 실현한다는 선거공영제에 따른 것이다. 정치자금법상 선거보조금은 정당으로, 공직선거법상 선거 비용 보전금은 후보자에게로 각각 지급된다. 이렇게 보면 선거와 관련해 ‘이중으로’ 지원되는 셈이다.
● “투명한 감시 필요”…정치권 개정 논의는 뒷전
정치권 일각에선 폐지론도 일고 있지만 헌법에 명시된 정당 국고보조금을 아예 없애는 것은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입법권을 쥔 각 정당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낮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국고보조금에 대한 감시 기능 강화가 우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정당의 보조금 사용 내역을 일반인이 확인하려면 항목 총액 정도만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고, 세부 증빙 자료는 선관위를 찾아가 열람해야 한다. 그나마 3년 전까지는 자료 열람 가능 기간이 3개월로 제한됐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2021년 유권자의 평가에 필요한 자료에 대한 접근 제한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리고서야 올해 2월 겨우 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렇지만 자료 열람 가능 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된 것이 전부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 등에선 보조금 사용 내역의 투명한 공개를 위한 법 개정을 꾸준하게 요구하고 있다. 선관위도 2021년을 비롯해 세 차례에 걸쳐 정당의 수입·지출 내역을 인터넷에 상시 공개하도록 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정치권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이 개정안은 20대에 이어 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지만 또 자동 폐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오유진 간사는 “정당이 어떤 장난을 해도 알 수 없는 시스템”이라며 “유권자들의 지속적이고 상시적인 감시를 피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당보조금이 필요하다면 회계감사 규정 강화 등 제도적 개선을 통해 정당보조금이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당보조금이 많다고 더 좋은 정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시받지 않은 거액의 보조금 지급은 정당에 대한 국민 불신만 높일 뿐만 아니라 정당 스스로의 자생력마저 잃게 만들 수 있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