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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수도’ 오명 쓴 美 워싱턴… “중범죄 처벌강화” 대책 마련 나서[글로벌 현장을 가다]

입력 | 2024-03-27 23:39:00


23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북동쪽의 쇼(Shaw) 구역. 벽면 곳곳에 낙서가 가득한 단층 건물들 사이로 여기저기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잡초만 무성한 공터 앞에는 마약에 취한 몇몇 부랑자들이 모여 행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이트클럽 등을 중심으로 갱단, 마약거래상 등도 자주 모인다. 여기가 세계 최고 권력자가 머무는 백악관에서 불과 1.6km 떨어져 있는 곳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이곳의 교차로에서는 17일 새벽 총기 난사로 2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지난해 9월에도 10대 소녀 3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다치는 총기 사고가 발생했다. 주민 레예스 씨는 “5년 동안 이곳에 살았지만 요즘처럼 무서웠던 적은 없다. 강력 범죄가 급증했다”고 우려했다.》



미국 수도 워싱턴 북동쪽 쇼 지역의 교차로에서는 17일(현지 시간) 2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입은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최근 미국 전체의 강력 범죄가 감소하고 있는데도 이처럼 유독 워싱턴에서만 살인, 강간, 강도, 집단폭행 등 4대 강력 범죄가 모두 증가해 우려가 높다. 이유를 둘러싼 논란도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2020년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목 조르기로 숨진 후 미국 내에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확산되고 경찰 수와 예산이 대폭 줄어든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11월 대선에서 맞붙을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사안에 관해 상대방의 책임을 주장하며 대선 쟁점으로 삼을 뜻을 밝히고 있다.

살인 등 4대 강력 범죄 급증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지난해 워싱턴에서 발생한 살인으로 274명이 숨졌다. 1997년 이후 26년 만의 최고치다. 이에 따라 워싱턴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인디애나주 클리블랜드,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테네시주 멤피스에 이은 미국 ‘5위 살인 도시’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도 얻었다.

워싱턴 살인 사건의 90% 이상은 총격에 의해 발생했다. 희생자 274명의 연령대는 노인, 성인, 청소년, 영유아 등으로 다양했다. 사망 장소 또한 집, 지하철역, 자동차 안, 골목길, 공원 등을 가리지 않았다. 지역별로는 저소득층 및 흑인 밀집 지역인 워싱턴 동부 애너코스티아 일대에서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는 뉴욕, 시카고 등 다른 미 대도시와 비교할 때도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현상이다. 지난해 1∼9월 미 70대 주요 도시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같은 기간보다 살인 사건이 늘어난 도시는 18곳(25.7%)에 불과했다.

워싱턴과 멤피스에서는 같은 기간 4대 강력 범죄가 모두 증가했다. 워싱턴 경찰 노동조합 또한 최근 시 의회 청문회에서 지난해 워싱턴의 살인, 강도, 성폭력이 각각 한 해 전보다 188%, 66%, 42%씩 증가했다고 우려했다.

플로이드 사태 후 경찰 급감

사고 현장 인근의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선 대낮에도 마약에 취한 부랑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워싱턴 의회는 최근 도심 강력 범죄가 늘자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강력 범죄가 급증하면서 도심의 슬럼화는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식당과 상점은 강도 사건이 거듭되자 심야 경비를 고용하고, 퇴근하는 직원들을 근처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는 차량 서비스를 도입했다.

워싱턴 상인 연합회는 최근 집권 민주당 소속의 흑인 여성 시장 뮤리얼 바우저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서한도 보냈다. 워싱턴 전역에서 강력 범죄가 급증해 1990년대 잠시 등장했던 ‘미국의 살인 수도’란 오명이 되살아나고 있다며 속히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워싱턴 내 강력 범죄 급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가 급증하면서 도심 공실률이 높아진 가운데, 치안을 유지할 경찰관 수가 급감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ABC방송에 따르면 플로이드 사태 이후 사표를 낸 워싱턴 경찰관은 전체 경찰관의 약 3분의 1인 1426명에 달한다.

당국이 신입 경찰 채용을 확대하고 있음에도 플로이드 사태 이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경찰관 수가 500명 이상 부족하다. 마찬가지로 강력 범죄에 시달리는 멤피스 역시 최근 경찰관 수가 20% 이상 감소했다.

당국이 그간 중범죄에 지나치게 관용적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워싱턴 의회는 이달 초 마약 거래와 불법 총기 소지, 강도 등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살인, 성폭력 등 중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거나 연장하고, 마약청정구역(drug free zone)을 설정해 마약 거래 의심자에 대해선 검문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

민주당이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는 워싱턴 의회는 2년 전인 2022년까지만 해도 절도, 차량 탈취, 강도 등 범죄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는 형법 개정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강력 범죄가 급증하고 주민 불만이 높아지자 불과 2년 뒤 정반대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중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미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된다. 루이지애나주는 이달 초 살인, 성범죄 등을 일으킨 청소년에 대한 감형을 제한하고 차량 강도와 마약 범죄에 대한 최고 형량을 높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주리주 의회 또한 지난달 총기 범죄와 중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법 개정을 했다. 켄터키주, 뉴멕시코주 등도 강력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범죄 감소세” vs “軍 동원”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사안에 정반대 태도를 취하며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올 1월 유세에서 “워싱턴에선 매일 총격이 발생하고 있다. 재집권하면 군(軍)을 동원해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주장했다. 불법 이민자 급증이 미국 내 강력 범죄 급증의 원인이라며 이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펴겠다고도 했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임기 때보다 오히려 각종 범죄율이 낮아졌다고 반박했다. 그는 19일 성명에서 “폭력 범죄는 5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고, 살인 범죄율도 역사상 가장 급격한 감소세”라며 “2020년 전임 행정부에선 살인 사건 증가율이 역대 최대였다”고 맞받았다. 실제 같은 날 연방수사국(FBI)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미 전체의 살인 범죄는 13.2%, 폭력 범죄는 5.7% 감소했다.

또한 작은 정부, 감세 등을 주장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 오히려 경찰 예산이 삭감돼 치안이 지금보다 더 악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악관은 “공화당은 지역 법 집행기관에 비용을 지원하는 예산을 삭감하고 FBI의 범죄대응 부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며 바이든 대통령은 이와 달리 경찰 예산 삭감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미국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치안 수준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지난해 12월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7%는 “치안이 악화되고 있다”고 답했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