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당의 ‘겁외풍경’
선화가(禪畵家)인 허허당(虛虛堂)은 그림 그리는 스님입니다. 2012년 경북 포항시 죽장면 비학산 자락 산골마을에 있는 그의 암자에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개울 물 앞에 있는 11평짜리 단칸방 암자에는 ‘휴유암(休遊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쉬면서 노는 암자’라는 뜻입니다.
스님의 선방에는 붓과 먹, 팔레트와 물감 등 그림 도구와 찻잔, 이불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습니다. 단칸방인 휴유암은 명상을 하면 선방, 그림을 그리면 화실, 누우면 침실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1974년 열여덟의 나이로 해인사에서 출가한 그는 향곡 스님 문하에서 수행하던 선승이었습니다. 1983년 지리산 벽송사 방장선원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어 본격적으로 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유명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에 텅 빈 진리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어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합니다. 그 뒤 꾸준히 국내 전시회 뿐 아니라 2000년 스위스 취리히, 2010년 하와이, 2017년 벨기에에서 초대전을 가졌으며 영국 사치갤러리 선정 작가이기도 합니다.
“도는 결코 찾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모든 것을 비워 버리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그래서 ‘비고 빈 집’이란 뜻의 ‘허허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부처님의 8만4000개 법문에 담긴 깨달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붓을 잡았어요. 그림 실력 부족으로 6, 7년간 엄청나게 방황했지만 지극한 ‘사무침’이 쌓이니 붓이 움직이더군요.”
허허당 스님은 자신의 작은 암자에서 선화를 그려왔습니다. 붓을 자유롭게 놀려서 학의 춤을 그린 ‘선무’, 동자승이나 새를 수없이 그려넣어 거대한 화엄세계의 풍경을 묘사하는 수행의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그는 수천수만 동자승을 배경 화면에 가득 채워 그 속에 탑을 세우고, 나무를 심고, 새를 날리고, 꽃을 피우고, 숲을 이루게 했습니다. 작은 동자승이 모여 장엄한 화엄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장엄한 우주는 하나의 큰 ‘생명 덩어리’이자 ‘생명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학들의 춤을 그린 ‘선무’를 허허당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단박에 깨닫는 ‘돈오돈수’ 선 수행법처럼, 붓을 던지 듯이 그리는 새의 날갯짓은 굉장히 자유롭고 통쾌하다.”
허허당의 대표작은 2008년 가로 12m, 세로 2.8m 크기에 100만 명의 동자승을 모자이크처럼 그려 넣은 ‘화엄법계 백만 동자-새벽’입니다. 이 작품을 그릴 때는 1년 2개월 동안 하루 17시간씩 건빵과 생수만 먹으며 작업했다고 합니다. 너무도 간절한 마음으로 생명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표현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백만명의 동자승이 한 화폭에 들어가 있고, 그것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완성됐다는 점, 그리고 백만동자가 거대한 풍경을 이뤄낸다는 점에서 놀라게 됩니다. 무엇보다 한계를 넘어선 그의 집요한 끈기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가 40년간 그린 화엄법계도의 또다른 대표작인 ‘화엄법계도 십만동자-방광’은 2000년 스위스 취리히 전시회 때 유럽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허허당 스님은 “백만동자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기원한 작품이며 십만 동자는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통일을 염원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화엄법계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 생명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화엄은 어떤 사상적 배경이 아닌 우주는 하나의 큰 생명임을 고함치고 싶은 생명의 몸짓입니다. 그래서 ‘화엄법계도’는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 이념,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순수 생명의 활동이지요. 지구촌에 버려진 생명, 인간의 탐욕과 권력에 의해 이유없이 파괴되고 유린당한 생명들을 한 수행자로서 위로하기 위해 참선하며 그리게 됐습니다.”
화엄법계도는 해인사와 불일미술관 등 국내뿐 아니라 스위스와 미국 하와이에서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백만동자를 그린 여파로 허허당 스님은 목디스크와 현기증으로 7년 간 투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후유증이 남긴 고통을 마주하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창출한 작품이 ‘겁외풍경’입니다.
겁외풍경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리기보다는 품는 것입니다. 닭이 알을 품듯 존재의 내밀한 그 무엇을 끊임없이 품고 사는 일입니다. 밤알이 무르익으면 절로 떨어지듯이… 오래 품어야 합니다. ‘겁외풍경’은 제 안에 무려 30년을 품고 있었네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가나아트센터 1층에서는 4월17일부터 29일까지 ‘허허당 초실존화 그림콘서트 겁외풍경’ 전시회가 열립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허허당 스님의 신작이 90여 점이 선보일 예정입니다.
그의 그림에서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수천 수만의 동자승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우주의 한 복판인 듯, 화석처럼 태고적 신비를 담은 듯한 색채와 물방울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그는 좁은 암자의 토굴에서 벗어나 마당으로 나아가 캔버스에 물감을 흘리고, 떨어뜨리고, 햇빛과 비바람, 눈과 얼음을 맞게 하며 독창적인 실험으로 그림을 완성해나갔다고 합니다. 생명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펼쳐 나간 붓의 터치감에서 창작에 대한 작가의 열정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달이나 화성의 표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포나 신경체의 연결망처럼 신호가 흘러갑니다. 드론이나 인공위성, 우주선에서 내려다본 지구행성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겁외풍경’은 다양한 철학과 예술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한 것이 많습니다.
아인슈타인과 니체의 철학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재즈와 블루스에서 느껴지는 생명 에너지의 파장을 명상한 작품도 있습니다. 또한 고흐와 피카소, 램브란트에게 영감을 얻고, 천지창조의 에너지를 주제로 한 작품도 있습니다.
화엄법계도에서 자그마한 동자승이 거대한 화엄세계를 이루었듯이, 겁외풍경에서는 붓으로 물감을 흘려서 떨어뜨린 물방울 하나하나가 춤을 추면서 신비한 우주의 ‘생명’을 노래합니다. 푸르스름하고, 불그스름한 고색창연한 빛이 환상적인 오로라처럼 캔버스에 펼쳐지네요. 열정적이고 신비한 우주 법계를 표현한 다양한 색감에서는 통쾌한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겁외풍경’은 작가의 40년 화업 중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세월 밖’ 풍경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겁(劫)이란 산스크리트어 ‘kalpa’에서 온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우주가 개벽한 때부터 다음에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을 말한다고 합니다. 힌두교에서는 1칼파는 43억2천만 년이라고 하네요.
불교 ‘잡아함경’에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가 1유순(由旬, 약 15km)인 큰 바위를 100년마다 한번 씩 비단 옷자락으로 닦아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져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영겁(永劫)의 세월’이란 영원한 겁의 시간이니 셀 수 없는 무한한 세월입니다. 그런데 ‘겁 바깥의 풍경’이라니요. 작가의 명상과 상상은 끝이 없나봅니다. 겁의 시간을 벗어난 ‘세월 밖의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깊은 사유를 통해 표출된 고요와 떨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허허당은 “추상화는 작가의 정체성이 모호하고, 현대화는 문명의 냄새가 너무 짙어 ‘초실존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실존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세계, 생명활동을 회화적으로 묘사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초실존화’라는 장르 이름을 붙였습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한 명상을 통해 미지의 ‘세월 밖의 세계’를 만나고자 하는 수행의 그림입니다. 일체 만물의 생명의 근원을 마주함으로써 우주 법계의 생명활동(원소의 집합체)를 깨닫기 위한 작업이지요.”
4월17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빌딩 1층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겁외풍경’ 전시회 오프닝은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가수 이안의 사회로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와 철학박사 최진석 교수가 축사를 할 예정입니다. 또한 한국 1세대 재즈뮤지션 김준과 재즈보컬리스트 웅산의 공연도 펼쳐집니다.
허허당의 ‘겁외풍경’ 전시회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팸플릿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이 마치 병풍처럼 앞뒤로 담아있네요. 한쪽은 붉은색 바탕, 다른쪽은 검은색 바탕 위에 우주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겁외풍경 작품이 펼쳐집니다. 굳이 작품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념품이다. 허허당 스님은 “책상이든, 식탁 주변이든 집안 어느 곳에 펼쳐놓으면 우주의 기운이 전달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