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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잘 썼냐고요? 장그래처럼 최선은 다했습니다”

입력 | 2024-03-29 03:00:00

12년 만에 ‘미생’ 완간 윤태호 작가
시즌2서 ‘사장 장그래’ 성장담 그려… 부하 아닌 주체적 리더의 고민 담아
“최고의 바둑은 내 최선 이끈 상대몫… 댓글 달아준 독자들, 최고의 상대”



윤태호 작가는 27일 서울 마포구 슈퍼코믹스스튜디오에서 “12년 동안 연재하며 독자 반응을 살피기 위해 댓글을 꼼꼼히 읽었다. 어떤 이야기를 쓸지 고민되던 차에 ‘작가가 변죽만 울리고 있네’라는 댓글을 읽고 정신을 차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결국 최고의 바둑이란, 나의 최선을 이끌어낸 상대의 몫일지도.”

만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옛 바둑 스승의 말을 떠올린다. 중소기업 ‘온길 인터내셔널’ 사장이 된 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스승의 조언에서 묘안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과거 장그래는 스승에게 “최고의 바둑, 대국은 뭐냐”고 물었다. 이에 스승은 “바둑은 혼자 두는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스승은 “묘수가 가득하려면 상대의 바둑도 굉장히 좋아야 한다. 내가 결점 없이 둔다는 건 상대 역시 결점이 없거나 적었다는 반증 아니겠냐”고 했다. 스승은 우문현답을 덧붙인다. “상대도 나도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내가 이겼을 때 이보다 최선일 수 없었던 바둑이 나온다.”

20일 출간된 ‘미생 시즌2’ 21권의 마지막 장면. 더 오리진 제공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 ‘미생’이 12년 만에 완결됐다. 20일 ‘미생 시즌2’(더오리진) 20, 21권이 동시 출간돼 종지부를 찍은 것. 윤태호 작가(55)는 27일 서울 마포구 슈퍼코믹스스튜디오에서 동아일보와 만나 “힘에 부치고, 팔을 다치는 등의 이유로 여러 번 쉬어서 약 5년 동안 연재를 중단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2년 연재를 시작한 뒤 완결까지 12년이 걸린 대장정”이라고 말했다.

“최고로 잘 썼냐는 질문엔 쉽게 답하기 힘들죠. 하지만 장그래처럼 최선을 다했습니다.”

2012∼2013년 카카오웹툰에 연재된 ‘미생’ 시즌1은 바둑에 인생을 걸었다 실패한 고졸 출신 장그래가 종합상사인 원 인터내셔널에 입사하면서 겪는 좌충우돌을 그렸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같이 폐부를 찌르는 명대사로 독자들의 선풍적 지지를 받았다. 2015년부터 연재된 시즌2는 장그래가 중소기업 온길 인터내셔널에서 일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의 기업문화를 생생히 살려냈다. 2014년 방영된 동명의 tvN 드라마에 힘입어 시즌 1·2 단행본 판매량은 약 300만 부에 달한다. 그는 “시즌2에선 장그래의 입사 동기인 ‘장백기’처럼 4년제 대학을 나온 평범한 직장인의 삶도 충실히 다루고 싶었다”며 “회사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다 갖춘 직장인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동력으로 살아갈까 고민했다”고 했다.

12년 전 연재를 시작한 만큼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그래는 시즌1에서 무턱대고 야근하며 열심히 일한다면, 시즌2에선 동료와 선후배를 챙기며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리더로 묘사된다. 그는 “요즘 시선으로는 장그래는 너무 열심히 일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빌런’(악당)으로 비칠 수 있다”며 “주 52시간 근무 시대에 맞춰 작품을 낡아 보이지 않게 했다”고 설명했다.

“장그래가 성장한 만큼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도 담으려고 했어요. 상급자인 ‘오상식’, ‘김동식’의 부하 직원이 아니라 독립적 주체라는 걸 보여주려고요. 그래서 결국 온길 인터내셔널의 사장이 장그래에게 사장직을 물려준 거죠.”

시즌2는 이창호 9단과 마샤오춘 9단의 제3회 삼성화재배 결승 5번기 제5국을 모티브로 한다. 이 경기 216수에서 이창호는 드디어 승리를 확신하는 듯 ‘계가’(計家·대국이 끝난 후 이기고 진 것을 가리기 위하여 집 수를 헤아리는 일)를 향해 달려간다. 같은 216수를 내세운 미생 마지막 화에서 장그래는 후배 ‘조아영’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승기를 잡은 이창호, 결혼하는 장그래. 미생을 완결한 그는 완생(完生)에 이른 걸까. 윤 작가는 두 손을 합장하며 이렇게 답했다.

“그건 모르죠. 다만 제겐 미생을 읽고 댓글을 달아준 독자들이 최고의 바둑 상대였습니다. 묘수로 가득한 삶을 살던 제게서 최선을 이끌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